조선시대의 대유학자 퇴계선생이 46세 때 단양군수로 있었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청유하며 많은 자취를 남겼다.
퇴계선생은 부인을 병으로 앞세운 뒤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명종은 놓아주지 않았다.
퇴계선생이 요양할 뜻을 청하자 명종은 마침 자리가 비어있던 단양군수로 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임 10개월만에 선생의 넷째 형인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선생은 형제가 한 지방에서 위 아래의 관직을 갖고 있으면 좋지 않다며 사표를 제출하였고, 조정에서는 선생을 소백산맥 넘어 풍기군수로 임명한다.
옥순봉의 바위에 퇴계선생이 쓴 「단구동문(丹丘洞門)」글씨나, 기생 두향이 퇴계선생의 부음을 듣고 투신한 강선대는 충주호에 묻혀 가물 때나 물밖에 드러난다.
퇴계선생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단성면 하방리 선암계곡 입구에서 손발을 씻었는데, 퇴계선생은 마음까지 깨끗하게 한다는 뜻에서 바위에 친필로 「탁오대(濯吾坮)」라고 새겨 넣었다.
또 퇴계선생은 가뭄을 이겨내기 위해 하방리에 복도소(復道沼)라는 보를 쌓고, 자주 와서 심신의 피로를 풀었는데, 한 옆의 바위에 「복도별업(復道別業)」이라고 써서 새겨 넣었다.
바위들은 모두 적성산성입구의 수몰기념관 마당으로 옮겨져 있다. (자료제공 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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