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이 무렵이면 해마다 생각나는 시(詩)가 있습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필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릴 때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필 닐리리

천형(天刑)의 문둥이시인 한하운이 ‘가도가도 끝없는 전라도 길, 붉은 황토 길’을 떠돌며 쓴 눈물의 시 ‘보리피리’는 가난하기만 하던 1950년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불치의 문둥병이 죄 아닌 죄가 되어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애(天涯)의 고아처럼 처절한 삶을 산 한하운은 해마다 보리가 익는 계절이 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보리피리’가 아니고도 보리에 얽힌 이야기는 부지기수입니다. 오늘 날 전 세계적으로 재배되고있는 보리는 그 역사가 1만년이나 된다고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도 보리는 쌀 다음의 주곡으로 긴 세월동안 애환을 같이 해왔습니다.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늦봄 춘궁기 ‘보릿고개’는 우리조상들이 운명처럼 겪어야 했던 인고의 잔혹사(殘酷史),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해마다 이 때면 양식이 바닥나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을 하던 일이 다반사(茶飯事)였기에 ‘봄이 왔으나 봄이, 봄이 아니로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시구(詩句)로 배고픔의 고통을 탄식하곤 했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는 정부가 30%보리혼식을 강요한 때도 있었습니다.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아이들 도시락을 검사했고 음식점에는 공무원들이 혼식여부를 단속하기도 했습니다. 보리가 여성의 피부에 좋다는 웃기는 거짓말도 그 때 정부가 만들어 낸 말입니다.

오늘 날 풍요로움을 누리는 젊은 세대들은 보리쌀의 형태조차 알지 못하겠지만 40대 이상의 노장층에게 보리는 추억이고 향수이기도 합니다. “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로 시작되어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 누나”로 이어지는 윤용하의 ‘보리밭’도 세대를 초월해 애창곡이 되어 있으니 보리는 ‘보리피리’나 ‘보릿고개’의 아픈기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리 하면 뭐니 뭐니해도 청주가 낳은 송계(松溪) 박영대화백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 30여 년 넘게 오로지 보리그리기만을 고집해 오고 있는 송계화백은 '보리작가'로 불릴만큼 그 명성은 이미 정평이나있습니다.

화면에 가득한 푸르고 누런 청맥(靑麥), 황맥(黃麥)은 마치 바람에 출렁이는 실제보리밭을 보는 듯 착각마저 들게 합니다. 국내는 물론 ‘동경전(東京展)’ 대상(大賞)으로 해외에서도 인정받고있는 송계화백은 해마다 일본에 초대돼 전시회를 갖고 있으며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정겹기만 하던 보리밭은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렸고 이제 그 모습은 그림에서나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온갖 먹거리가 지천을 하고 쌀이 남아돌아 걱정인 세상이 되어있습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찰기가 없어 후 불면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꽁보리밥. 그 밥이라도 실컷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 어찌 필자뿐이겠습니까. 보리의 계절에 ‘보릿고개’를 되돌아 봅니다.
/ 본사고문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