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째 출마, 재선 국회의원에 민선 1기 청주시장 경력

▲ 1937년 9월7일 청원군 오창면 출생● 학력오창 가좌초등학교 졸업(1951년)청주 대성중학교 졸업(1954년)청주 상업고등학교 졸업(1957년)청주대학교 경제학과 졸업(1961년)●경력충북 4.19연합회 회장제10대 국회의원(민주통일당)제12대 국회의원(신민당)전 한국천주교 평신도협의회 상임위원 겸 감사전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위원 제23대 청주시장(민선) 무소속 김현수 청주시장 후보는 어느 후보 보다도 화려한 정치 이력을 지니고 있다. 유신말기와 5공시절에 야당간판으로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선 1기 청주시장이라는 화려한 기록도 그의 것이다. 김 후보는 무려 45년에 이르는 정치인생을 통해 서민적이면서도 저돌적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있다. 삶 그 자체가 정치인생이지만 그렇다고 권모술수에 능한 이른바 닳고 닳은 정치꾼은 아니다. 정치적인 면을 굳이 들자면 40여년을 하루 같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간다는 것이다. 김 후보는 이에 대해 “나의 선거운동은 주민들을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주민들이 모인 자리라면 초대한 자리든 아니든 가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렇다보니 김 후보의 상의 옷섶에는 언제든지 개소식 등의 테이프 절단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얀 장갑과 가위가 들어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민선 청주시장 선거에 내리 3차례 출마하면서 김 후보는 고정표를 바탕으로 확실한 득표력을 과시했다. 무소속 조성훈, 민자당 지헌정 후보를 누르고 당선의 영예를 안은 1기 선거에서는 7만4000여표를 얻어 2위 조성훈 후보를 2만표 가까이 따돌렸다. 국민회의 나기정 후보가 당선된 2기 선거에서도 5만5000여표를 획득해 당선권에 약 1만여표 차이로 육박했다. 한대수 후보가 당선된 지난 3기 선거에서는 약 5만1000표를 얻었다. 한 당선자와는 2만표 차이가 났다. 결국 지난 3차례 선거에서 최소 5만표의 득표력을 확인한 셈이다. 김 후보 스스로도 “나는 기본 5만표를 가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정당지지도가 압도적이고 열린우리당 후보도 당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두 정당의 후보들은 경선을 구실로 매스컴의 홍보효과를 톡톡히 봤다. 하지만 선거는 이제부터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조직을 가동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김 후보의 득표 그래프 기울기가 하향세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더기 출마가 이뤄진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삼자구도 속에서 확실한 고정표가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얘기다. 심대평의 국민중심당이 과거 김종필의 자민련 만한 바람을 일으킬지에 대해서도 여론은 부정적이다. 김 후보는 이에대해 “비록 당의 지지기반은 허약하지만 인물, 경륜, 능력, 경험 등에 있어서 타 후보에 비해 손색이 없다. 특히 민선 청주시장을 지낸 검증된 후보라는 장점이 있다”고 항변했다. 김 후보는 무소속 출마와 국민중심당 입당을 놓고 저울질 하다 5월4일 자신의 선거사무실을 방문한 심대평 대표 앞에서 직접 입당원서를 썼다. 김 후보는 이 자리에서 “국민중심당이 이번 선거에서 실패하면 더 이상 충청도를 대변하는 정당이 탄생할 수 없을 것이며, 나 자신도 정치적 운명을 걸고 입당하는 것이다”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 김현수 후보는 한국천주교 평신도 협의회 상임위원을 맡는 등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사진은 김후보가 다니는 수동성당을 찾은 정진석 추기경(당시 청주교구 주교)
인간 김현수
80년대 재야 성향 야당 활동 두각
잦은 당적 변경은 한국 정치사를 읽는 듯


김현수 후보는 청원군 오창면 백현리에서 중농가인 김영식씨와 서순아씨의 9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 후보가 청주상고를 졸업한 뒤 청주대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초는 자유당 말기로 3.15 부정선거와 이로 인해 촉발된 4.19혁명으로 시국이 어수선했다.

김 후보는 이때 청주지역의 4.19운동을 주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로인해 충청북도 경찰국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을 뻔 했으나 창문과 담장을 넘어달아났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가 있을 때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는 것.
김 후보는 이에대해 “이 대통령 하야 이후 4.19의거 위령제 집행위원장 겸 제주를 맡아 행사를 주도했고, 대학생 신분이었지만 경찰국을 접수해 치안유지와 관련한 실무를 맡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 후보는 이같은 인연으로 4.19 관련 기념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1961년 대학을 졸업한 김 후보는 이듬해부터 제1야당인 신민당에 참여해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걷기 시작한다. 1968년에는 신민당 청원지구당 위원장을 맡았고 1973년 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김 후보의 여의도 입성은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4성 장군 출신의 민기식, 야당 거물인 이민우 후보를 제치고 당선의 영광을 맛본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인 10.26 사태가 일어나고 1980년 5월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 확대와 함께 국회를 해산하면서 김 후보는 당시 국회의원 임기 6년 가운데 1년6개월만 채우고 금배지를 빼앗기게 된다.

국회의원직만 박탈당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활동 규제대상에 묶여 4년여에 걸친 기나긴 정치방학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11대 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했고, 정치활동규제 3차 해금에 따라 창당된 신한민주당 멤버로 1985년 12대 선거에 출마해 정치적 부활에 성공한다. 김 후보는 청주·청원이 하나의 선거구(중선거구)로 묶인 12대 선거에서 민정당 정종택 후보에 이어 2등으로 당선됐다.

1980년대는 12.12 쿠데타에 이어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정권의 정통성 회복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반독재 투쟁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이같은 민주화운동의 물결은 1987년 4.13 호헌조치를 기화로 이른바 넥타이부대가 가세한 6.10항쟁이 일어나면서 직선제 실시를 약속한 6.29선언을 이끌어 낸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야당 국회의원이던 김 후보는 대정부 질문에서 25년 동안 이어져온 군부독재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날렸으며, 당의 대외협력위원장 자격으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10대회, 6.26 평화대행진을 준비하는 실무책임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김 후보는 13대 총선, 14대 총선에서 각각 청주갑, 청원군을 지역구로 민주당,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내리 낙선한다.

1995년 자민련 당무위원을 맡아 녹색바람을 타고 민선 1기 청주시장에 당선된 것은 그의 오뚝이 정치인생을 잘 대변해주는 정치 이력이다. 4.19 주동자에서 시작해 재야성향의 정치인으로 살아온 김 후보가 1992년 14대 총선에서 국민당으로 말을 갈아탄 것은 사실상 보수 정객으로 변모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결국 김 후보는 총선연대에 의해 철새정치인으로 지목을 받아 낙천·낙선대상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김 후보는 이에대해 “굴곡이 많았던 대한민국 정치사 속에서 야당이 간판을 바꾸거나 당이 해체돼 여러 당을 옮겨다녔을 뿐 철새처럼 행동한 적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당에서 자민련, 무소속, 국민중심당 등으로 옮겨다닌 후반기의 정치 행보는 이같은 해명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찌됐든 민선 1기 청주시장에 당선된 김 후보는 환경단체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지만 무심천 하상도로 건설과 하수처리장 확장 등 인상 깊은 정책을 펼쳤다.
김 후보는 재임 당시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돌출행동으로 종종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좋은 기사든 나쁜 기사든 크게만 써달라”는 당부(?)로 기자들의 기를 죽이기도 했다.

김후보는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한 부녀당원의 중매로 청원군 북이면이 고향이 변자문씨와 결혼했으며 봉배(39), 영배(37) 등 두 아들이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청원군수 출마를 선언했다가 경선에서 탈락한 뒤 도의원 출마로 선회한 김현상씨는 다섯째 동생이다.

김현수의 비전
김현수 후보의 청주시장 출마 기자회견문은 구구절절 당당하다. ‘시장으로 뽑아주면 앞으로 이렇게 해보겠다’는 식이 아니라 1995년 청주시장에 취임해 2015년까지 중장기 발전계획을 세웠는데, 잠시 내줬던 자리에 다시 돌아가 나머지 과업을 완수하겠다는 태세다.

김 후보는 실제로 “3년의 짧은 임기 동안 다하지 못한 정책과 사업들을 마무리하고 행정중심복합도시, 오송분기역, 청주국제공항과 연계해 청주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히고 있다.

주요 공약은 청주·청원통합 추진과 도심공동화 해소, 상당구에 시외·고속버스터미널 건설 등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무심천 하상도로 철거계획 보류다. 무심천 하상도로는 건설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임기 내내 자랑거리로 내세웠던 치적사업 가운데 하나다.

김 후보는 청주·청원 통합과 관련해 “당선되면 시장직을 걸고 통합을 추진하겠다. 행복도시를 사이에 놓고 청주와 대전, 천안이 배후도시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통합은 가장 선결과제다. 임기내 못 이루면 물러날 각오가 돼있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이밖에도 수돗물 정수 수준 강화, 상가주변 주차단속 무인카메라 철거, 300세대 시영아파트 보급 등 듣기에 따라 귀가 솔깃한 공약들로 잔치상을 차렸다.
김 후보는 저조함을 면치 못하는 정당지지도를 의식한 듯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정당을 보고 선택해야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은 인물을 보고 선택해야 한다”며 “그동안 국회의원 활동과 민선 시장 경력을 통해 충분히 검증된 후보를 골라야 재정과 시간낭비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후보는 청주시장에만 내리 4번째 도전장을 던진 것에 대해 “단체장은 국회의원과 달리 집행권이 있다. 모든 재정사업을 진행하고 개발, 복지, 교통, 직원인사 등을 직접 결정한다. 그래서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자리”라며 도전의욕을 불태웠다. 

김현수가 본 상대후보

 오효진
청원군수로 보여준 열정 대단
“군수로서 못한 통합 시장 되면 가능하냐” 독설도

열린우리당 오효진 후보는 김 후보가 자민련 소속 청주시장으로 일할 때 김종필 총재가 영입한 인사다. 김 후보는 “같은 당 소속으로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며 “오 후보는 청원군수로 일하면서 보여줬듯이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 후보는 그러나 청주·청원 무산에 따른 공과를 엄격히 물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완강한 반대에서 훗날 돌변한 것은 일관성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통합이 무산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김 후보는 또 “군수로서 못한 일이 시장이 된다고 가능하겠냐”며 뼈있는 말을 내뱉었다.

남상우
행정경험 풍부, 적극성 장점
청주대 학연 강조, “선의의 경쟁 파트너다”


김 후보는 한나라당 남상우 후보에 대해 우호감을 나타냈는데, 그 연결고리는 청주대 동문이었다.
김 후보는 “청주대 동문이라 동문회에서 항상 만나는 사이인데, 본의 아니게 대결을 벌이게 돼 모양새가 그렇다”고 전제한 뒤 “그렇지만 부담감 없이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또 시장 후보로서 남 후보에 대해 “행정경험이 풍부하고 모든 일에 열정을 보이는 적극적인 자세가 장졈이라고 평가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