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비마다 불의에 맞서 의연히 항거
김대중 전대통령 흠모해 세 번 눈물 흘려
마지막 희망은 부산에서부터 걸어 오는 것


체게바라 좋아하는 박학래 옹 ②
열 다섯 살 ‘소년가장’이 첫 직장으로 들어갔던 그 목욕탕의 주인이 되자 그는 비로소 생활의 여유를 찾고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1963년 창당한 민주공화당은 박학래선생을 청원지구당 사무국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3선 개헌을 획책하는 공화당에 오래 머물지 않고 탈당을 하고 나와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 반대투쟁에 나선다. 당시 정보기관의 감시 속에 각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투쟁을 벌였고 온갖 협박 속에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은 박선생을 포함해 단 세 사람뿐이었다.

결국 69년 3선 개헌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의 토대는 마련했으나 그것이 죽음을 부른 재앙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박선생은 ‘공명선거’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다.

71년 8대국회의원 선거 때 관권선거에 맞서 뜻 있는 이들과 함께 전국에서 처음 ‘공명선거 캠페인’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결국 공화당 후보가 낙선되고 신민당후보가 당선됨으로서 ‘청주=야당도시’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 BR>
그는 또 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부인과 사모관대를 차려입고 아들 며느리, 딸 사위 등 온 가족이 ‘공명선거’라고 쓴 어깨띠를 두르고 거리를 행진, 캠페인을 벌인다.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그는 91년에는 충북공명선거실천공동대표로도 추대된다.

▲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사모관대 차림으로 아들 며느리 딸 사위 등 가족들을 이끌고 공명선거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박학래선생(오른쪽). 가운데가 부인 채천식여사. 유신체제의 숨막힐 듯 한 분위기 속에 박선생은 78년 제 9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도전한다. 그의 상대는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공화당 민기식후보, 신민당 원내총무 이민우후보였다. 여론이 예사롭지 않자 공화당은 사전선거운동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그를 구속하게 만들고 사퇴압력을 가했으나 옥중출마를 강행해 2만 표를 얻는다. 제대로 선거운동을 했더라면 당선도 될 뻔한 득표였다. 이때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박선생은 84년 군소정당인 신정사회당에 입당해 수석부총재 자리에 올랐으나 오래 있지는 않았다. 박선생은 82년 60세의 나이로 청주대 경영대학원(82)에 입학해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다. 보통학교를 중퇴해 평생 한을 안고 살아 온 그였다. 이어 충북대(90). 충남대(91, 92), 한양대행정대학원(95)등에서 잇달아 향학열을 불태운다. 못 배운 한도 있었으려니와 곧 부활될 지방의회 진출을 위한 준비였다. 예상대로 지방자치는 부활되었고 박선생은 95년 제5대, 98년 제6대 도의회에 비례대표로 당선된다. 7년에 걸친 두 차례 임기 중 박선생의 성실한 의정 활동은 정평이 나있다. ▲ 1970년대 어느 날 한 행사에 참석했던 박학래선생. 왼쪽에 같이 서있는 이가 고 최병준선생이다.
박학래 선생은 김대중 전대통령을 남달리 흠모(欽慕)한다. 그래서 세 번 울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김씨가 일본에서 납치됐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왔을 때이고 두 번 째는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에 당선 됐을 때, 세 번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이다. 그는 김 전대통령의 진보적 정치관이 좋았다고 한다.

그가 80년 전두환정권에 의해 수배령이 내려졌던 김대중씨 장남 홍일씨를 2개월이나 숨겨 줬던 일도, 김대통령이 설립한 아태재단 충북지부장을 맡은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이다.

박선생은 또 쿠바혁명의 화신(化身) 체게바라를 좋아한다.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민중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산화(散華)한 그의 숭고한 혁명정신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박선생은 통일운동과 시민운동에도 관심이 깊다. 고 최병준선생과 청주시민회를 창립했고 현재도 민주평통 고문, 충북참여연대 고문, 통일시대 충북연대 고문으로 행사 때면 꼭 앞자리에 앉아 후배들에게 힘이 돼 주고 있다.

그에게는 많은 일화가 있다. 지방자치 모범국인 일본의 히꼬네시를 찾아갔던 일이 있다. 사전약속이 없어 면회를 해 주지 않는 시장에게 ‘난향십리 덕향만리(蘭香十里 德香萬里·난초의 향기는 십리를 가지만 사람의 덕은 천리까지 향기가 간다)’라는 글을 써주고 떼를 쓰다시피 면담을 하고 온 적이 있다. 독일까지 가 각 지역의 지방자치를 공부하고 온 일도 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생면부지의 김수근씨를 서울로 찾아 가 목욕탕 신축설계를 간청해 오늘의 학천탕이 명 건축물로 남게 된 일, ‘아내의 헌장’을 국회에 청원했던 일도 그 중의 하나다.

고령(高齡)도 아랑 곳 없이 박선생의 마음은 여전히 젊다. 요즘도 가까운 이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앙리듀낭의 ‘솔페리노의 회상’을 이야기하고 ‘밤은 가도 꿈은 남듯이’라는 정훈의 시를 읊곤 한다. 하지만 세월은 어쩔 수가 없어 하루하루 체력이 달라지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그는 언제나 부드럽고 조용하다. 공·사석을 불문,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이나 행여 말한 마디 허사(虛辭)가 없는 것은 타고 난 성품과 수양(修養)의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거기다 결코 남의 험담을 하는 법이 없으니 그야 말로 ‘신사 중의 신사’이다.

박선생에게는 마지막 소원이 하나있다. 부산에 내려가 청주까지 걸어서 올라오는 일이다. ‘요리 집 보이’로 가기 전 “부산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풍문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천리 길을 굶어가며 걸어 온 일이 있었다. 구포다리 아래서 노숙(露宿)을하며 “부산이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갚, 눈물짓던 70년 전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다시 그것을 재현하고싶은 생각 때문이다.

올해 85세. 의지할 데 없는 소년가장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뎠던 박학래선생은 연초 가동을 시작한 소각장 ‘대한환경’을 비롯해 학천건강랜드, 학천탕, 약수탕, 제일목욕탕 등 네 개의 목욕탕을 운영 할 만큼 부를 쌓았다. 모두 정직과 성실이 일궈낸 결과물이다.

그러나 오늘 그의 일생을 새삼 조명하는 것은 경제적 성공이나 목욕업의 ‘대부’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고비마다 불의에 항거해 올곧은 삶을 실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제의 창씨개명에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에도, 공화당의 관권선거에도 그는 외면하지 않고 의연히 맞섰던 것이다.

박학래선생이야말로 어른이 없다는 우리사회의 ‘어른’이다. 경쟁하듯 다투어 낯내기를 좋아하는 세태에 그는 언제고 그림자처럼 뒤에 서서 젊은이들의 사표(師表)가 되고있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어른’인 것이다.

가족으로는 부인 채천식여사(76)와 출가한 딸 노숙 노희씨, 그리고 대한환경 대표인 장남 노석, 노영 노창씨 등 5남매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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