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전후하여 나는 새로운 문화의 단계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등장이다. ‘우리’로 감싸던 세계에서 ‘내’가 나서는 시절이 된 것이다. 이른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재미는 바로 ‘나의’ 독설과 의견에 독자들이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나’라는 말을 대뜸 쓰고 있는 것과 같다. 과거 감히 어떻게 ‘나’를 내세울 수 있었는가? 기껏해야, 주어 없이 ‘∼라고 본다’ 정도에서 그치든지, 아니면 아예 삼인칭화 시켜 ‘필자’라고나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오죽 ‘나의’가 유행하니, 재치꾼은 <남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대꾸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나는 나의 등장이 나쁘지 않다.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생각이 분명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더욱이 개인이 집단 속에서 함몰되지 않는다는 것이니 만큼, 싫어할 까닭이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학자들의 논문도 내가 없는 글은 정리수준에 그쳐 자신의 주장이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드러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에 문학상을 받은 소설제목에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식의 실명이 등장한다. ‘이 사람을 보라’도 아니고, ‘사랑한다면 그들처럼’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의 등장이 서구적 개인주의와 더불어 나온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논리다.
우리도 <심청전>과 <홍길동전> 식의 분명한 실명소설의 전통이 있으며, 오히려 ‘K’나 ‘Q’라는 익명성은 근대의 합리주의에 빠진 인간의 절망과 미망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의 ‘소설가 구보씨’ 정도는 익명성으로 나가는 모더니즘의 단계이리라.
얼마 전 마하 1.4로 시속 1700㎞에 이르는 초음속 비행기 ‘T-50’(골든 이글)의 개발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정치적 쟁점 속에서 묻혀 가는 것에 안타까워하는 어떤 공대 교수의 글에서도, 나는 자랑스럽게 등장한 실명이 너무도 반가웠다. 23년간 경남 사천에 박혀있는 박노선 공장장과 죽음의 서약을 하고 시험비행을 한 조광제 중령이라는 이름이었다. 나는 차라리 제목을 ‘박노선과 조광제’로 하지 그랬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늘 이야기의 제목이 그래서 실명이다. 공동체를 내세우는 윤리는 자칫 전체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국가를 내세우다보면, 민족국가적 색채가 지나치게 강해져 소수에 대한 탄압으로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비유겠지만, 히틀러의 소수에 대한 탄압도 그와 같은 맥락이 극심하게 증폭된 결과이다. 유태인은 그래도 소수 중의 다수였기에, 아니면, 강력하고 지적인 소수였기에 교황도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약자였던 집시나 여호와의 증인은 아예 묻혀버린 소수가 된다. 내가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그 나라의 인권 정도를 파악하는 척도는 바로 소수 또는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관심의 정도에 있다.
김승환 교수는 우리들에게 ‘해방공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준 문학비평가이다. 학자로서 개념 하나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자 영광스런 일이다. 청주를 위해서는 <오페라 직지>를 선보이기도 했다. <직지심체요절>에 관련된 사랑 이야기를 꾸려내어 대내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나의 [디지털 문화의 철학적 이해]라는 글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서 밥을 사겠다고 해놓고, 아직 사지 않는 나쁜 사람이기도 하다.
이철수 화백은 판화라는 미술장르를 한국에 뿌리내린 선봉이다. 충북대 50주년을 위해서도, 충청리뷰의 생일을 위해서도, 기념판화를 선사하기도 했다. 게다가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제천 박달재 밑에 살면서 정말 많은 양의 농사를 짓고 있다는 점이었다. 취미나 운동 삼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농사꾼이라는 사실은 그가 삶과 결코 유리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민중판화가인 오윤의 영향을 묻고, 해방신학류 판화운동의 모방성을 지적하자, 순순히 시인하던 수수한 작가였다. 그는 이제 그의 창작을 선(禪)과 명상으로 승화시키면서, 독재 남미와 중국 동북의 판화운동과도 변별되는 한국적 예술가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아는 이 두 사람이 1인 시위를 했다. 1인이라는 것은 개인의 등장이고, 실명의 노출이다. 따라서 대중시위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나는 내가 하지 않는다고 남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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