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4월도 날씨는 내내 청명했습니다. 국민소득 100달러의 가난한 나라, 척박한 강토, 그 땅 산수간에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백화제방(百花齊放)으로 꽃들은 다투어 산야(山野)에 만발했습니다.

보릿고개가 시작될 무렵이었지만 피 어린 함성과 총성만 없었던들 세상은 예나 다름없이 태평해 보였습니다.

‘4월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48년 집권이래 숱한 파동을 일으키며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이승만정권이 정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관권을 총 동원해 전국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때나 이때나 불의와 맞서는 것은 깨어있는 국민들과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된 가운데 마산에서 시위 중 실종된 고교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물위로 떠오르자 경찰의 만행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순식간에 폭발하고 맙니다.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던 자유당부통령후보 이기붕의 발언이 신호탄이 되어 전국에 총성이 메아리쳤습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9일 하루동안 총격으로 죽은 사람이 서울에서만 100명이 넘었고 몇 일 사이 전국에서 186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부상을 당한 사람도 6026명이나 됐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반 독재 시위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할 때까지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결국 ‘관제국부(官製國父)’로 떠받들어져 종신집권을 꿈꾸던 독재자 이승만은 이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힘에 의해 권좌에서 끌어 내려지고 맙니다.

평소 아무 힘도 없어 보이던 국민들이었지만 한번 일어서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는가를 보여준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학생혁명, 민중혁명, 국민혁명이었습니다. 하지만 ‘4월혁명’은 불행하게도 꿈을 펴기도 전에 이듬해 5월 16일 권력에 눈먼 정치군인들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맙니다.

‘4월혁명’은 30년이 넘도록 그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4·19의거’ ‘4·19’ ‘4·19학생의거’ ‘4·19혁명’등으로 그때마다 달리 불려 오면서 군사정권의 의도적인 홀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등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자들은 국민에 의한 정권전복이라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 당시 교문을 박차고 나와 거리를 질주하던 젊은이들은 이제 모두 60고개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나라는 민주화되고 경제는 좋아졌지만 사회는 여전히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이 참다운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구현에 있었다면 그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인 ‘미완의 혁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46년 전 그 4월, 목이 터져라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내 달렸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이 혼돈스러운 사회를 보는 심정은 한 마디로 착잡하기만 합니다. 선진사회의 실현은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가.

그날의 영령들이 잠들어있는 서울 수유리 4·19묘지의 빛 바랜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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