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충주시 목행동에 건설한 충주 비료 공장은 22만평 부지 위에 수만평의 건물과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당시로선 최신식 공장으로, 요소 비료를 생산함으로써 외화 절약은 물론 고용증대 및 비료 자급 능력 향상 등 국민 경제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
충주 비료 공장은 순수 우리 기술로 건설한 괴산 발전소와 1957년 준공된 문경의 시멘트 공장을 연계한 산업 시찰 코스로 지정되어 매일 수백명의 산업 시찰 관광객들이 찾아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 대표 산업체로 자리매김했다. 1961년 미국 공보원이 발행한 ‘자유 세계’책자에 게재된 사진과 글을 보면 충주 비료 공장 준공식에 800여명의 정부 고관과 외국 사절단이 참석했고 규모와 시설면에서 세계적인 시설로 소개됐을 만큼 당시 우리나라 산업체로선 국내외의 대단한 관심과 기대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국 원조로 건설된 충주 비료 공장은 건설 당시 충주와 나주 2곳이 경합했는데 여러 가지 조건면에서 충주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지만 전남 지역과 나주 지역 정치인들의 물밑 유치 운동이 전개되면서 혼선이 야기됐다. 1954년 3월 충청일보 보도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 경제인협회장을 맡았던 국회의원 이도영씨와 청원 출신 국회의원 곽의영씨, 자유당의 실세 국회의원인 최순주씨 3명이 상공부 장관을 방문 그 간의 진행과정을 보고 받고 당초의 충주 건설을 재확인 받으면서 충주 건설이 실현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료 공장 충주 유치는 충북선 철도가 제천, 봉양 까지 연장돼 중앙선과 연결되는 산업 철도 확장에도 이바지했고 충주 지역 경제 발전과 고용증진에도 기여하며 낙후된 충북 경제를 살리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5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후반에 걸쳐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충주 비료 공장은 70년대 말에 완공된 나주 비료 공장과 울산 비료 공장의 등장으로 문을 닫게 됐고 85년 3월 새한 미디어에 매각되어 상징되는 건물 1채만 남긴채 모두 철거되면서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그 기반 위에서 우리 산업과 농업이 성장했고 우리 충북도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는 사실은 꼭 기억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김운기 전 언론인·프리랜서 사진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으로 취재,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