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혼들 피울음 떠도는 지리산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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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혼들 피울음 떠도는 지리산에 가다
  • 김영회 고문
  • 승인 2006.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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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가려졌던 전설적인 빨치산 총수
이 나라 현대사의 ‘가장 고독했던 인물’
스님 독경 속 한줌 재되어 섬진강 물에


▲ 우리나라 오악(五嶽) 중 하나인 남악(南嶽)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해서 이름지어졌다는 지리산(智異山). 아름다운 이 명산이 민족사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현장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섬진강 강바람에 실린 매화 향기가 화개장터를 지나 계곡을 타고 벽소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월에 들어오면서 산은 온통 신록으로 넘쳐나고 있다. 연초록, 진초록으로 다투어 색깔을 뽐내는 온갖 나뭇잎들. 국립공원 지리산은 그렇게 날마다 녹음으로 우거져만 간다. 산 입구인 의신마을에 도착하자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나온 직원이 트럭을 몰고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길이 워낙 험해 트럭만이 산을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30여분 굉음을 뿜으며 울퉁불퉁한 오르막을 오르더니 그나마 길이 끊긴다. 산 위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요란한 물소리를 들으며 이리 저리 험한 바윗길을 오르고 내리기를 거듭하며 한 곳에 다다르니 하얀 안내판이 줄지어 서있다. 순간 긴장감이 온몸에 전해진다. 전설적인 빨치산총수 이현상이 토벌대에 의해 최후를 마친 역사의 현장에 온 것이다. 안내판에는 ‘매복하고 있던 토벌대가 이현상일당에게 집중사격을 가해 사살했다’는 무용담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 유명한 지리산 빗점골, 더 정확히 말해 합수내 흐른바위가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피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새들이 울고 있었다. ▲ 1992년 북한당국이 공개한 이현상의 유일한 얼굴사진.
이현상은 1905년 충남 금산군 군북면의 중농집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와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재학 중이던 25년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함으로써 일찌감치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6·10만세사건 때에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왜경에 체포된다.

2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던 그는 반일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4년간 복역한다. 출소 이후 박헌영·김삼룡 등과 함께 지하활동을 하면서 경성 콤 그룹을 결성하고 8·15해방 후 남조선노동당 연락부장 등의 요직을 맡는다.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됨에 따라 북으로 올라간 그는 당의 결정에 따라 48년 지리산으로 내려 와 운명적인 빨치산 투쟁을 시작한다. 6·25전쟁중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민군과 함께 부대를 이끌고 강원도까지 북상하던 이현상은 “다시 남하하라”는 당의 명령에 따라 소백산으로 내려왔으며 51년 5월 덕유산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의 주재로 최초의 남한 6도당 위원장회의가 열렸고 이때 인민유격대 남부군총사령관으로 공식 추대된다. 그러나 그는 ‘공화국 영웅’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53년 7월 박헌영 이승엽 등에 대한 남로당 숙청바람에 휘말려 평 당원으로 강등되고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됨으로써 최후를 마친다.

이현상은 지리산 입산이래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을 잡지 않고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다”며 생포를 독려하고 현상금까지 내 걸었다.

이현상을 잡기 위해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 4개 연대와 10개 경찰서에서 동원된 1만 명의 사단규모병력이 2중, 3중의 경계망을 편 가운데. 빗점골에 잠복 중이던 토벌대가 하산하는 이현상을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1953년 9월 18일 오전 11시였다.

당시 빨치산들은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와 같은 형국이었다. 굶어죽고, 얼어죽고, 총 맞아 죽어 세 번 죽는다는 것이 당시 빨치산들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뒤에 지리산 계곡에서 인골이 한 트럭 이상이나 나왔다고 하는 것만 봐도 군경토벌대의 공세가 얼마나 가혹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한 기록에 의하면 49년부터 5년 동안 1만 717회에 걸친 접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현상에 대해서는 숱한 비화가 전해져온다. 그는 모든 남부군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欽仰)을 받았다고 한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대원들은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을 만큼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며 그저 ‘선생님’으로만 불려졌다고 한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신의 계시’처럼 받아들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신비로운 존재였던 모양이다. 당시 지리산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현상이 축지법을 쓰느니, 몇 길 담장을 훌훌 뛰어 넘느니 하고 초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소 화내는 일이 없고 행군도중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대신 져 주는가 하면 전사한 대원의 시체를 보면 깊이 묻어주지 못 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던 휴머니스트였다고 한다. 이현상은 매우 감성적이었던 듯 사살된 몸에서 염주와 자작 한시(漢詩) 한편이 나왔다고 한다.

   
▲ 토벌대에 붙잡힌 빨치산들.
이들 중에는 무고한 주민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리풍운당홍동) 伏劒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胸有萬甲心有血(흉유만갑심유혈). 지리산에 바람과 구름이 일고 / 칼을 품고 남으로 천리 길 달려 왔네 / 한 순간도 내 나라를 잊은 적이 없고 / 가슴엔 굳은 각오 마음엔 뜨거운 피 솟구치네.

비록 빨치산이었으나 절절한 혼이 살아있는 비장한 글이다.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 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고 함께 빨치산 활동을 벌였던 이우태씨(제천출신·6대국회의원·97년 작고)는 88년에 펴낸 자전적 수기 ‘남부군’에서 이현상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당시 지리산에서 희생된 사람은 1만 명이라고도 하고 2만 명이라고도 한다. 저마다 전과를 과장해 군과 경찰의 주장이 다르니 정확한 통계가 있을 리 없다. 분명한 것은 빨치산 보다 훨씬 많은 무고한 주민들, 어린아이들마저 빨갱이로 몰려 무참히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이현상의 시신은 섬진강 다리 밑 송림주변 백사장에서 스님의 독경 속에 한줌의 재로 변해 강물에 뿌려졌다. 권총, 염주 등 그의 유품은 서울로 옮겨져 창경원에서 일반에게 공개됐다고 한다. 항일독립운동가로, 공산주의 혁명가로,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로 남과 북 모두에서 외면 당했던 이현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했던 사람’일지 모른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고 시대를 등진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공산주의의 불씨가 거의 꺼진 오늘 그가 살아있다면 과연 온몸을 불태워 또 다시 공산주의 투쟁을 벌일까?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내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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