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일찍이 ‘여자와 소인배(小人輩)는 불가원 불가근(不可遠 不可近)하라’고 일렀습니다. 여자와 소인배는 간사하고 속이 좁아 멀리하면 원망을 하고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기 때문에 멀리하지도, 가까이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여자라고 해서 모두 간사하고 속이 좁은 것은 아닐 터이지만 남존여비 사상의 ‘원조’였던 공자였기에 여자를 소인배와 같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공자가 2천여 년 전에 태어났기 망정이지 여권이 확립된 오늘날에 태어났던들 큰 코를 다쳤을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흔히 언론과 권력의 이상적인 관계를 공자의 말을 빌어 ‘불가원 불가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감시해야할 언론이 권력과 너무 밀착이 돼서는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언론과 권력은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고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친소(親疎)관계를 벗어나 객관적인 보도와 논평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인 것입니다. 언론은 사주나 기자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이론은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복잡 다단 한 사회는 인간 관계로 뒤얽혀 굴러가기 마련이고 특히 갖가지 연(緣)으로 얽히고 설 킨 우리사회이고 보니 객관적이고 공정하게만 기사를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거기다 경영자들이 편집권을 좌지우지하는 지역언론의 형편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최근 충청리뷰 사태에 대한 보도를 놓고 청주지역 신문들이 내부적으로 갈등이 없지 않은 듯 합니다. 리뷰사태를 지역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일선 기자들과 권력의 눈치에 익숙해진 경영층이 사실보도를 놓고 이견을 보이면서 갈등이 내연(內燃)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써 봤자 기사화 되지도 않을 바에야 아예 쓰지 않는다”는 자조 어린 푸념에 “지금 청주에는 잠 못 이루는 기자가 많다”는 토로(吐露) 마저 들리고 있기에 말입니다.
사실 이번 리뷰사태에서 서울의 전국지와 청주지역 신문들이 보여준 편집태도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조선 동아 한겨레 중앙 등 메이저 신문들이 이번 리뷰 사태를 언론자유침해라는 대 명제에 초점을 맞춰 속보를 계속하며 주요기사로 다루고 있는 반면 더 큰 관심을 보여야 할 지역의 신문들은 오히려 사실보도조차 외면하거나 축소하면서 나아가 진실을 왜곡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문의 1차적 기능이 사실보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에서 사건자체를 외면하거나 의도적으로 본질을 왜곡하고 호도 하는 신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번 리뷰사태는 그러한 물음에 대한 정답으로 각 매체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웅변으로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번 충청리뷰 사태는 리뷰만의 일이 아니라 지역언론 공통의 일이요, 나아가 언론자유수호라는 대의명분이 걸린 중 차대 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거나 호도 하는 행위는 사회적 공기로서의 존재이유, 아니 언론이기를 이미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러한 작태는 필시 신문을 사회의 공기(公器)가 아닌 사주나 경영자의 전유물로 착각하는데서 온 결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문들이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는커녕 일상적인 냉소의 대상이 되고 지탄마저 받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어찌 자업자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언론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식을 가졌다면 부끄러워 할 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사를 쓰는 일이 직업인 기자들이 기사 쓰기를 포기해야하는 사회. 그로 인한 고뇌로 잠 못 이루는 기자들이 많다는 2002년 11월의 청주. 다행인 것은 잠 못 드는 그들에게서나마 ‘희망의 증거’를 볼 수 있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벌레(蟲)’라는 비하를 당하는 것이지요. 정말 창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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