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일만 더 살아 계셨어도 아들이 대통령 되는 걸 봤을텐데”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부친 이홍규옹이 10월 31일 오후 6시30분 향년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공교롭게도 이옹이 별세한 31일은 대선 D-49일이어서 이 후보는 부친 49재 (齋) 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됐다. 강남 삼성병원에 마련된 이옹의 빈소에서는 3일장 내내 ‘조문정치’의 백미가 연출됐다.
이 후보측에서는 대선 직전이라는 점을 감안해 조화는 물론 부조금조차 받지 않는 등 최대한 검소하게 장례식을 치르려고 애썼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부친 장례식장에는 정·재계, 종교계, 언론계 등 각계 주요 인사 2000여명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보내 이회창 후보를 위로했다. 박 실장은 이 후보에게 “대통령께서 각별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다”며 자신의 휴대폰으로 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 후보와 연결시켜줬다.
이 후보의 최측근인 양정규 한나라당 의원은 조문을 온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잘 부탁드린다”고 간곡히 말했다. 그러자 김 총재는 양 의원을 한참동안 응시하다가 “사돈 남 말하고 있네”라는 말로 맞받았다.
이에 앞서 권철현 후보비서실장은 조문을 온 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저희들 얘기이지만 50일만 더 사셨으면 아들이 대통령 되는 것 보고 돌아가셨을 텐데…”라고 말해 한 최고위원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한 최고위원은 특별히 대꾸를 하지 않다가, 권 실장이 같은 말을 반복하자 “(부친의) 연세가 어떻게 되셨죠”라며 말을 돌렸다.
특히 이 후보와 가장 가까이에서 조문객을 안내하던 권철현 실장이 조문객에 따라 배웅 거리에 차이를 보인 것도 흥미로운 대목. 권 실장은 최근 한나라당 복당설이 제기된 박근혜 대표의 경우 장례식장 현관까지 따라나왔고, 박 대표가 차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봤다. 반면 상대적으로 이회창 후보와의 연대가 힘들 것으로 예상되는 김종필 총재의 경우에는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까지만 따라 나왔고,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경우에는 분향소 입구에서 배웅했다.
이날 장례식장에 있던 취재진은 최근 병역비리 의혹이 제기된 이 후보 장남 정연씨의 출현에 촉각을 세웠다. 그러나 한나라당 당직자들은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계획으로 취재진을 따돌렸고, 정연씨는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 유유히 빈소 안으로 사라졌다. 미국에 있던 정연씨의 귀국으로 자칫 ‘병풍’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선 후보들도 빈소를 찾았다. 그러나 정몽준 의원 등은 비교적 조용히 조문만 하고 돌아간 반면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차를 마시며 한나라당 당직자들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 노 후보는 다음날 있을 부산 선대위발대식을 염두에 두고 권철현 실장에게 “내일 나는 부산 탈환하러 간다”며 “부산은 바람이 많은 곳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기다린다”고 ‘뼈있는 말’을 건넸다. 이에 대해 권철현 실장은 “이 후보가 부친상 때문에 꼼짝못하고 발 묶여 있을 때 많이 끌어모으라”면서도 “바람이 어떻게 부느냐에 따라 틀리다”고 맞받았다.
한편 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빈소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 후보에게 “중요한 시기에 아버님께서 상당히 도움을 주시는 것 같다”는 ‘묘한 말’을 건네 눈길을 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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