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이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언론은 항상 ‘불공정 편파 보도’ 시비에 휘말렸다. 특히 <조선일보>는 약방의 감초처럼 논란의 중심에서 빠지지 않았고, 불공정 보도는 DJ 고립화를 겨냥한 ‘제3후보 죽이기’에 맞춰졌다.
14대 대선 투표일을 불과 일주일 앞둔 92년 12월9일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는 서울지검에 장문의 고발장을 접수시켰다. 고발장은 <조선>의 10가지 편파보도 사례를 적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11월28일자에 실린 유근일 칼럼이었다. ‘정주영 변수’라는 제목의 칼럼은 40% 안팎의 부동표 유권자들이 “정주영씨에게 ‘굉장히 많은 표’를 허락함으로써 그를 당선시킬 것인가, 또는 그에게 ‘적당히 많은 표’가 가게 함으로써 김대중씨를 당선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 ‘아주 조금만’ 표를 줌으로써 김영삼씨를 당선시킬 것인가 하는 세 가지 선택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12월3일자 주돈식 칼럼(제목 ‘부동표의 향배’)은 “87년 당시의 표를 거의 고정표로 하고 있는 김대중 후보는 정주영 후보가 김영삼 후보 표 잠식결과에 따라 당락이 좌우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며 좀더 노골적으로 ‘정주영 변수’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이 같은 <조선>의 논리 전개는 영남지역의 반DJ 정서를 자극해 YS로의 표 결집에 기여했다. 칼럼을 쓴 주돈식 논설위원이 이듬해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면서 청와대에 들어가 정무수석, 공보수석, 문화체육부 장관, 정무장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 것도 오랫동안 뒷말을 남겼다.

<조선>의 사주는 ‘밤의 대통령’

반DJ 정서를 바닥에 깔고 정 후보를 공략한 <조선>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92년 12월15일 국민당은 “YS의 당선을 위해 지역감정 조장도 불사해야 한다”는 부산시 기관장들의 발언을 녹취해 폭로했지만, <조선>은 사건의 초점을 도감청 문제로 돌려 버렸다.
92년 대선 투표일에 나온 <조선>의 1면 머리기사 제목도 불공정 보도의 대표작으로 지탄을 받았다. ‘김영삼, 김대중 양자구도’라는 제목은 유권자들로 하여금 “정주영 후보에게 던지는 표는 사표(死票)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YS는 <조선>이 베푼 ‘은혜’를 잊지 않았다. ‘떠오르는 최고권력자’는 부인을 데리고 선거 다음날 저녁 방일영 당시 <조선> 회장의 서울 흑석동 저택을 찾아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끈끈한 유대를 과시했다. 선거가 끝난 후 열린 방 회장의 칠순 잔치에서 신동호 당시 <스포츠조선> 사장은 “방 회장님을 ‘남산’이라고 부르고 싶다. 낮의 대통령은 그 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 분이셨다”고 추켜세웠다.
일개 언론사 사주가 밤중에 자기 집으로 ‘낮의 대통령’을 불러낼 정도의 힘을 보여줬다면 이만큼 적절한 별명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밤의 대통령’은 족벌언론 사주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조선>은 “우리가 대통령을 만들었다”며 기고만장했고 김영삼 정권이 출범 초 대북 문제 등에 있어서 <조선>과 사뭇 다른 정책을 보이자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한완상 통일부장관 등을 겨냥한 기사들을 내보냈다.
이들은 결국 <조선>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중도 하차했고, 이때부터 ‘영향력 1위 신문’이라는 <조선>의 자부심에는 ‘스스로 권력화된 언론’이라는 비판이 따라붙게 됐다. 92년 대선을 거치면서 <조선>이 승승장구(?)하자 97년 대선에서는 중앙일보가 ‘대통령 만들기’를 흉내 내기에 이른다.
97년의 ‘희생양’은 이인제 후보였다. <중앙>은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 후보가 여론조사 지지도에서 이회창 후보를 앞서는 상황에서 ‘YS의 국민신당 지원설’을 연일 대서특필해 이인제의 대권가도에 치명타를 입혔다.
<중앙>은 투표일을 불과 3일 남겨놓은 그해 12월15일 ‘대선 양자구도 압축’이라는 1면 머릿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이회창, 김대중 후보가 선두 다툼을 벌이는 여론조사 상의 ‘사실’을 독자에게 알린 것이지만, 반DJ 성향의 유권자들로 하여금 “이인제를 지지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한나라당의 논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국민신당은 12월초에 <중앙> 정치부 기자가 작성한 ‘이회창 경선전략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이라는 문건을 폭로했다. “술자리에서의 ‘창자’ 발언 등 이 후보의 말이 거칠다는 지적이 있다”는 등 이 후보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조언들을 담은 선거전략 보고서는 <중앙> 고위층이 선거에 개입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고 언론계에도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급기야 전국의 신문, 방송, 통신사 정치부 기자 103명이 투표 전날 “국민여러분, 기자들이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언론의 선거개입을 사과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2년 뒤 홍석현 <중앙> 회장이 탈세 혐의로 구속되자 언론계에서는 <중앙>의 97년 선거보도와 99년 세무조사의 상관성을 따지는 시각들이 생겨났다.

<조선><중앙> 이어 <동아>도 가세

그동안 거대언론들이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불편부당과 엄정중립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홍 회장은 지난 2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에) 누가 누구를 편들고, 어떤 사주, 어떤 신문, 어떤 부장이 누구 편을 들었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신문사(조선일보)가 92년 김영삼 후보를 지원했고, 우리(중앙일보)가 97년 이회창 쪽에 기울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물론 홍 회장은 “올해 양대 선거를 앞두고 불편부당과 엄정중립을 선언했다”고 밝혀 이 같은 일들이 ‘과거지사’라고 강조했지만, 작년 세무조사로 현 정부와 깊은 앙금이 생긴 조중동이 과거의 감정을 삭이고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 동안 대선에서 비교적 목소리를 아껴온 <동아>가 이번 선거에 이르러서는 <조선>, <중앙>보다 더 편향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는 지적은 92년과 97년의 ‘업보’가 아직 청산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편파보도가 ‘제3후보 죽이기’를 통해 반DJ 표의 결집을 꾀했다면 올해 조중동이 보여주고 있는 선거보도의 특징은 반대로 ‘1강2중’구도의 고착을 통해 ‘반이회창 표’의 결집을 막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청한 한 일간지 간부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조중동이 올해 선거에서 더욱 편파적인 보도를 하는 것에 대해 일선 기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설령 조중동이 이런 식으로 목표를 달성한다고 해도 올해의 선거보도는 결국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대중들이 더욱 더 다양한 미디어에 노출된 언론 환경에서 언젠가는 독자들도 조중동의 여론몰이에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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