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전국이 월드컵 신드롬에 흠뻑 빠져 있을 때다. 6월 19일 낮 청와대가 갑자기 분주해진다. 대통령과 재벌그룹 총수들과의 오찬 간담회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99년 8월에 있던 정·재계 간담회 이후 만 2년 2개월만에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이 마주 앉는 자리였다.
삼성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LG 구본무, SK 손길승, 한화 김승연 회장 등 참석했던 총수들의 얼굴은 밝았다. 지난 99년 정부의 재벌 개혁 칼날에 잔뜩 흐렸던 총수들의 얼굴 날씨는 이날 완전히 개어 있었다. ‘더 이상의 개혁은 없다’라는 자신감이 조심스레 묻어 나왔다.
재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특히 올 들어 삼성, LG 등 재벌 총수들은 활발한 대내외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내적으로는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잇따라 열면서 확고한 집안 단속에 들어갔고, 외적으로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단 회의 등에 참석하는 횟수를 늘리고 있다. 전경련을 비롯한 한국경제인총협회(이하 경총) 등 재계 이익단체들도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그들만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재벌 개혁’이라는 구호가 재계 주변에서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개혁?. 그거….” 지난 10월초, A 재벌그룹의 한 고위임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대선을 두달여 앞둔 시점에 재계의 움직임이 궁금하던 터에 현 정권의 재벌 정책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뒷말이 궁금해 다시 묻자, 그의 얼굴 표정에는 ‘(재벌 개혁은) 끝난 것 아닌가’라는 표정이 들어 있다. 그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98년 이후 한 1~2년 우리에겐 살얼음을 걸었지. 외환위기 주범이다, 어쩌다 하면서 마치 ‘재벌은 타도의 대상’ 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졌잖아. 그리곤 기업간 빅딜로 이어졌고, 기업 체질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글쎄, 오히려 그룹간, 기업간 편중이 더 심해진 측면이 있지. 재벌 개혁은 매 정권마다 있었지만 결론은 뻔한 것 아닌가.”
그는 마지막으로 “정권초기에 해놨던 기업구조조정과 관련한 각종 규제와 법률 등을 다시 정비할 필요도 있고, 주 5일제 등도 정부가 너무 앞서가는 것 같다”면서 “말기에 포퓰리즘(대중주의)적 정책 추진보다는 좀더 세밀하게 검토하고, 무리가 있으면 다음 (정권)으로 넘기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같은 임원의 생각은 최근 재계의 움직임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 10월 20일 재계의 대표적 이익단체인 전경련은 ‘기업구조조정 현황 및 개선과제’라는 보고서를 내놓고, 정부가 지난 5년간 추진해 온 기업구조조정 정책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정부의 주요 재벌정책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폐지해야 하고 ‘지주회사의 부채비율 및 지분율 규제’ 등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주 5일제’ 입법화에 대해서도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 5단체는 ‘반대’를 넘어 ‘적극 저지’로 나서고 있다. 지난 10월 14일 5단체의 상근 부회장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가 재계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입법화를 추진할 경우 적극 저지할 것”이라면서 “강행될 경우 현 정권과의 대화를 중단할 것”이라는 강경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정부와의 대화보다 국회를 상대로 직접 막겠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고, 일부 민주당 의원들을 상대로 직접 공략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한 관계자는 “레임덕이라고 하지만 그쪽(공무원)이 줄줄 새고 있지 않나”라며 “재계에 입장에서 현재 정부 눈치를 보거나, 말거나 할 것 없다”면서 자신감을 나타내 보였다.

재계의 사령부로 자리 굳힌 ‘전경련’

이같은 재계 움직임의 선두에는 전경련을 비롯한 재계의 이익단체들이 있다. 전경련의 경우 지난 99년 당시 김우중 회장의 대우그룹이 해체의 길로 접어들고, 상당수의 회원사들이 부도를 내면서 ‘이빨, 손발톱 다 빠진 종이 호랑이’ 신세였다. 막강한 위치의 회장직도 서로 피하면서 고령의 김각중 회장이 자리를 채우기도 했다.
하지만 올 들어 5대 그룹 총수들이 적극적으로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 참석하면서 전경련의 위상과 영향력이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5월 9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회장단 회의에 이건희 삼성 회장과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손길승 SK 회장 등 ‘빅3’를 포함해 13명의 재벌총수들이 참석했다. 이어 벌어진 6월 15일의 골프모임과 여름 하계세미나, 이어진 회장단 회의에서 10여명이 넘는 총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2년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라면서 “외환위기 이후 (전경련이) 소강상태에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올 들어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회원사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의견 조율이 잘 이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올 들어 전경련을 포함한 재계의 자신감 회복은 더욱 눈에 띈다. 올초부터 재계 차원에서 정치권에 ‘불법적인 정치자금은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전경련과 ‘대선평가위원회’를 두고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주장한 경총 등의 발언은 정치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지난 7월, 전경련이 주최한 제주도 ‘하계 세미나’에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나란히 참석했다. 두 후보는 물론 기업인들을 상대로 최대한 ‘친 기업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B 그룹의 한 임원은 “정부나 정치권에 대해 개별 기업으로 상대하는 것보다 전경련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무래도 모양새든 뭐든 낫지 않은가”라며 “대선을 앞두고 (기업이) 오해받는 일을 줄이고, 우리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면 된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회장 김창성)의 발걸음도 그 어느 때보다 빨라지고 있다. 경총 조남홍 부회장은 9월말 “정당별로 대선 후보의 윤곽이 잡히면 경제5단체 책임자들이 모여 대선 공약 평가를 논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우선 경총은 대선 공약 평가에 앞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 경총은 10월 9일 입사 이후 일정 기간 내에 노동자의 노조 가입을 의무화한 유니언숍(union shop)규정 삭제와 노조의 부당노동행위 인정 규정 신설 등을 골자로 한 대선 공약 정책건의서를 확정하고 각 대통령 후보 진영에 전달했다. 한 마디로 대선 공약에 자신들의 건의 내용을 반영하라는 압력을 행사한 셈이다.

대선공약 평가하겠다

경총은 건의서에서 “노사간 힘의 균형을 맞추고 노조의 불공정한 노동관행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현재 사용자에게만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하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노조의 부당노동행위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경총은 정당한 이유 없는 단체교섭 거부, 경제적 요구 사항이 아닌 주장 또는 활동, 주요시설물 점거 농성을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기업 입사와 동시에 노조 가입이 이루어지는 ‘유니언 숍’ 규정이 근로자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서 관련 조항 삭제를 주장했다.
유니온 샵 규정 삭제와 노조의 부당노동행위 인정 요구는 노동3권의 후퇴를 의미할 만큼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다. 이 때문에서 노동계에서는 “직권중재 등의 악법으로 노동3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경총 주장은 노조를 무력화시키겠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면서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경총이 전달한 대선 공약 정책건의서는 ▲산업평화 정착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지속가능한 복지 체계 ▲기업규제 완화 등 5개 부분 60여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60개 항목으로 구성된 건의서에는 중·고령자 고용 확대 특별법 제정, 노동부와 여성부로 이원화된 여성 고용 관련 행정기구를 노동부로 일원화 할 것과 ‘여성고급인력 정보은행’신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경총은 노사정위원회가 정치적 의사결정기구로 변질되고 있다고 보고, 노사문제에 대한 기본 원칙과 방향만 제시하는 중립적 자문·협의 기구로 존속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명시했다.

주5일제 계속 ‘딴죽’

경총이 선수를 치고 나오는 이유는 어쨌든 대선을 통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주5일제에 대해 경총이 자꾸 딴죽을 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난 10월 18일 경제5단체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자리를 함께 했을 때 김창성 경총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건의사항을 전달했다.
“주5일 근무제 실시시기를 2003년 7월 1일에서 2005년 시작으로 연기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관계 안정을 위해 제도 도입이 불가피하다”며 국회에 제출한 정부입법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최종 확정된 정부의 주5일제 입법안에 대해서도 시큰둥하다. 정부가 주5일 근무제에 따른 종합지원대책으로 제시했지만 경총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경총은 “세제·금융상 지원이 중소기업을 배려한 흔적은 엿보이지만 중소기업 실정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휴일수 축소와 관련돼서도 “휴가·휴무일이 3∼4일 가량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이웃 나라인 일본(129∼139일) 수준에 맞추려면 큰 폭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영자들 이익을 대변하는 경총의 이러한 행보는 자칫 잘못하면 노동계에 밀려 다음 정권에서 제 몫 찾기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목소리를 대변하는 쪽‘을 확실히 밀겠다는 사전 포석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

전경련, 경총…경제단체들 차이점

전경련, 민간경제인들의
자발적 단체 … 재계 이익 대변
경총, 국내 유일의 사용자 대표기구 … 노동 정책에 민감

경제관련 뉴스를 접하다보면, 자주 보거나 듣는 단체이름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등이다. 여기에 한국무역협회(무협)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중기협)도 들어간다. 이른바 ‘경제 5단체’다.
무역협회와 중기협은 말 그대로 무역과 중소기업 관련 단체라고 보면, 나머지 전경련과 경총, 대한상의는 어떻게 다를까.
전경련은 지난 1961년 7월 민간경제인들이 자발적으로 ‘한국경제인협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돼 1968년 3월 현재의 이름으로 바꾼 국내 최대의 경제단체다. 법적으로는 사단법인이다. 전경련은 이어서 재정, 금융, 산업, 통상 등 경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재계의 의사를 통일하고 이를 정부시책에 반영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고 밝히고 있다. 회원은 업종별 단체 65곳과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기업 380여개사, 외국계 기업 등을 포함해 모두 402곳에 이른다. 부설기관으로 한국경제연구원과 자유기업원을 두고 재계 이익을 대변하는 각종 정책 등을 내놓고 있다.
대한상의는 1884년 한성상공회의소가 그 뿌리로 설립연도로만 따지면 ‘전경련’보다 훨씬 앞선다. 경제단체에서 ‘맏형’으로 불릴 만하다. 1946년 5월 조선상공회의소가 창립됐고, 1948년 7월 대한상공회의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특히 1952년 12월 상공회의소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상공인이라면 모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따라서 농, 수산업 등 1차 산업을 빼고, 모든 업종의 대·중소기업을 망라하고 있다. 63개 도시에 지방 상공회의소가 설치돼 있다. 개정된 법에 따라 2005년부터는 의무적이 아닌 임의적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된다.
경총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유일의 사용자 대표기구다. 1969년 국내 산업을 대표하는 조선과 면방직업계에서 노사 대립이 크게 부각된 것이 창립의 계기가 됐다. 당시 위기 의식을 느낀 기업주들은 노조 문제를 기업 입장에서 대변할 단체가 필요했다. 일본을 벤치마킹한 끝에 기업인 모임인 닛케이렌(日經聯)을 본떠 1970년 7월 15일 경총을 설립했다.
초대 회장은 다시 가장 규모가 컸던 면방직업체 ‘전방’의 창업주인 고 김용주 회장이 맡았다. 경총은 기업주 입장에서 노사 문제를 풀어가기 때문에 회장을 맡으면 소속사 노조가 강경 투쟁 노선을 선언해 기업인들 사이에 경총 회장은 피하고 싶은 자리로 소문이 나 있다. 이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경총 회장 자리에 오르는 것을 꺼리는 형편. 현재 70의 고령인 김창성 회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김창성 회장은 경총 초대 회장인 김용주씨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회장직을 거의 떠맡다시피 했다. 후임자가 없어 벌써 세 번째 연임을 하고 있다.
경총은 현재 13개 시도의 지방경영자 협회를 산하에 두고 있으며,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망라해 4000여개의 회원사로 구성돼 있다. 최근에는 노사관계 범위가 확장되면서 경총은 인사관리, 복리후생, 산업안전 등 기업 운영에 있어 노동자들과 관계된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노동자와 관련된 정책을 내놓으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곳이 바로 경총이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경제와 한국 노사관계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ILO(국제노동기구)나 IOE(국제사용자기구)등과 연계를 통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총은 정책본부와 경제조사본부, 관리본부, 기획홍보실, 인재개발원, 노동경제연구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정책본부와 경제조사본부가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조남홍 상임 부회장이 ‘얼굴마담‘ 역할을 한다면, 실무업무는 대부분 김영배 전무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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