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군 김기반씨(85)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보고대회 증언

‘과거사법’ 따른 학살 피해접수, 지자체 조사·홍보역할 필요

   
▲ 독립유공자의 아들인 김기반씨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 2대에 걸쳐 박해의 삶을 살아야 했던 김씨가 아버지 김재형옹(작고)의 훈장증을 들고 있다.
청주지역 16개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상임대표 곽동철, 정진동, 곽태영·이하 충북대책위)는 3일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청주·청원지역 민간인학살 1차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날 보고대회에서는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생존자인 김기반씨(85·청원군 강내면 궁현2구)와 국군 소위에 전쟁을 치른 최원규씨(79)가 증인으로 나서 학살사건의 진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보고대회에 참석한 100여명의 유가족들은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고 민간인학살 피해 진상규명 신청서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충북대책위는 이재충 행정부지사와 면담을 갖고 피해 신청업무와 진상규명 작업에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충북대책위는 지난해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규명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피해 접수 홍보와 유가족 모임결성, 학살지 위령비 건립 등 추모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지난해 6월<충청리뷰>는 청원군 강내면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사건의 피해 유가족인 윤기중씨(75) 가족의 비극적인 사연을 보도한 바 있다. 당시 60여명의 강내면 일대 주민들이 지서로 끌려가 1주일동안 갇혀있다 군인들에게 총살당한 사건이었다. 윤기중씨의 부친인 윤천석씨(당시 36세)는 생때같은 7남매의 자식을 남겨둔 채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지난 3일 충북대책위의 청주·청원지역 민간인학살 보고대회에서 증언자로 나선 김기반씨는 바로 강내면 학살현장에서 탈출한 유일한 생존자였다.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생사를 넘어선 그날의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50년 7월 6일 오전, 한참 논일을 하고 있던 김씨는 지서에서 방공호 조성작업에 나오라는 전갈을 받고 면소재지로 나섰다. 200여명의 남정네들이 한나절 동안 땅파기 작업에 땀을 쏟았고 저녁 무렵 작업을 중단시킨 지서 경찰관은 보도연맹원만 남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귀가시켰다.

그날부터 65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창고에 갇힌채 죽음의 공포속에 마음 졸여야 했다. “밥은 식구들이 집에서 날라다 줬고 소·대변은 창고안에 드럼통을 반 잘라 누었어. 한명이라도 도망가면 일가족을 다 죽인다고 겁을 주니 움직일 수도 없었지.

그라구 면회오는 가족들한테는 ‘아직, 안나온 보도연맹원들 때문에 집에 못가고 있으니 마을에 남아있는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나오도록 하라’고 속인 거여. 그러니 안에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 속이 탈 노릇이지” 하지만 예기찮은 위급상황이 김씨에게 천우신조의 탈출 기회를 제공했다.

뜨거운 한여름 열기 때문에 창고문은 어느 정도 열어둔 상태였는데 갇힌 지 6일째 되는 날, 한낮에 갑자기 비행기 엔진소리가 들리더니 포탄 터지는 소리가 진동을 했다. 감시하던 경찰은 허둥지둥 몸을 피했고 갇혀있던 보도연맹원들도 너나없이 창고를 뛰쳐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지서쪽 나무 둥걸이 있는 곳으로 피해가는데 나는 이때다 싶어서 저너머 밭두렁으로 도망을 쳤어. 한밤중에 10리 너머 궁현리 형님집에 숨어있다가 다음날에 조치원 외갓집으로 옮겼어. 마누라하구 자식 둘이 기다리는 우리집이 있지만 갔다가는 잡힐 것 같아서 한동안 여기저기루 도망다닌겨”

국군과 경찰이 남쪽으로 후퇴하고 뒤늦게 강내면 야산의 학살현장에서 친척 시신을 찾아나선 김씨는 눈앞이 깜깜했다. “전선줄루다 두사람씩 팔을 묶어놓구 총을 쏴서 죽였어. 며칠전까지 창고에 갇혀서 이제나저제나 했던사람들인데…,여름이라 시체가 오래되서 팔을 잡으면 무슨 고무장갑 벗겨지는 것 같았어. 엄니나 부인들이 와야 옷바느질한 것 보고 자기 식구를 찾을 수 있었어”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김씨는 인민군 치하에서도 변절자로 낙인찍혀 정식당원도 아닌 후보당원의 처지가 됐다. 북에서는 보도연맹원 가입자체를 사상전향의 증거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무런 좌익활동 경력도 없는 사람들이 면위원장에 출마해 당선되는 상황이었다. “우린 그냥 아무 것도 아닌거여, 북선(북조선)에서두 인정못받구 남쪽에서는 쥑일라구 하구” 남북에서 ‘버림받은’ 김씨는 일제 치하에는 일본 본토까지 징용을 끌려간 2차 세계대전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1943년 20살 나이의 김씨는 일제의 보국대로 징용돼 일본 아마사키의 제철소에서 2년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뜨거운 데서 하루종일 일하고 나면 옷이 땀이 젖어서 소금끼가 허옇게 끼였어. 월급이라고 몇푼 받아서 모아둔 사람들은 밀선타구 귀국하다가 부산에 도착하면서 빼앗긴 사람들이 많어” 이때 중노동의 후유증은 그대로 몸에 남아 정기적인 병원 물리치료가 일상이 돼 버렸다.

다행히 김씨는 독립유공자의 유가족이라서 보훈병원 무료진료 혜택을 받고 있다. 부친 김재형옹은 조치원과 강내일원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검거돼 4년간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사립학교 교원이었던 부친 김옹은 생전의 민족독립을 위한 활동으로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일제에 징용되고, 다시 해방 5년만에 보도연맹원으로 낙인찍혀 국군의 학살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서글픈 우리 현대사가 김씨의 몸에 온전히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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