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고위 당직자들과 동아일보 기자들이 서울에서 질펀한 술자리를 벌이던 날 아침 우리 몇몇은 남도에 상륙해있는 봄을 보기 위해 경상남도 하동(河東)으로 내려갔습니다.

잘 알다시피 하동은 경상남도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진주시와 사천시, 서쪽은 전라남도 광양시와 구례군, 남쪽은 남해군, 북쪽은 산청군과 함양군,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시와 접하고 있는 인구 5만 4000여명의 이른바 ‘웰빙도시’입니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치솟음으로 생겨난 수많은 섬들을 품고 있는 남해바다에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있으며 그러한 까닭에 토끼봉(1,533m), 영신봉(1,650m), 삼각고지(1,586m) 등 1000미터가 넘는 고봉이 즐비하고 지리산에서 발원(發源)하여 남해에 이르는 섬진강은 한국 유일의 1급수로 하동의 젖줄이자 생명수입니다.

하동에는 신라 천년고찰(古刹) 쌍계사가 있고 유명한 화개장터에 청학동, 산등성이마다 즐비한 차 밭 등 볼거리가 널려있는 그야말로 한국적인 미를 두루 갖춘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 하동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입니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만 25년에 걸쳐 전 5부 16권으로 완성된 소설로,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장구한 민족사의 흐름을 배경으로 ‘최참판’ 일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 수난과 한을 안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의 역정을 그려 낸 대하소설입니다.

소설은 그 방대한 분량만큼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그에 얽힌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보여주면서 근대사 속에 연면히 이어 내려온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형상화함으로써 우리민족의 정신적 위상을 드높인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우리 일행이 하동을 찾던 날도 소설의 주무대인 평사리에는 전국에서 몰려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지난 날 양반주택의 표본인 ‘최참판댁’은 관광객들이 집안 곳곳을 둘러보느라 널찍한 안마당이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작가인 박경리씨는 토지를 쓰면서 평사리를 와 본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소설내용은 개화기 실제 있었던 사실과 아주 비슷하게 전개 돼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특기할 것은 대하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픽션에 불과한 내용일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명소화(名所化)시킨 하동군의 기획력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가진 것도 제대로 살려 내지 못 하고있는 실정인데 없는 사실을 가공해 관광명소로 상품화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더욱이 빨치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을 지리산역사관에 상세히 소개하고 최후격전지와 아지트에까지 표지판을 세워놓은 그 발상과 용기에 놀라움은 컸습니다.

하동군청관계자에 따르면 ‘최참판댁’에는 하루 평균 전국에서 2000여명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이는 1년이면 70만 명이나 되는 셈이고 관광수입만도 100억 원이 넘는 다고 하니 앞서가는 행정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남도에 먼저 봄이 왔다고는 하나 매화는 개화를 앞둔 봉오리만이 관광객들을 맞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화신(花信)은 섬진강 강바람에 실려 백두대간을 타고 날마다 조금 씩 북상(北上)해 올라 올 것입니다.

이틀간의 여행을 마치고 청주에 돌아오니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추잡한 성추행사건이 온통 TV화면을 덮고 있었습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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