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김정숙휴양소에서 양측 670명 민간교류
부문별 모임·전시회·오락경기·합동예술공연으로 진행

북으로 가는 길은 역시 쉽지 않다. 남북여성통일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 방북하는 모든 사람들은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방북단 행동 하나 하나가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품위를 유지하라는 것이 교육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요구였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과 말은 금물이다” “체제문화와 관련해 논쟁을 하는 것도 삼가라” “북한보다는 북측이라는 말을 써라”는 것이 이 날 받은 교육이었다. 또 한 여성단체 대표는 “너무 좋은 옷이나 물건은 되도록 가져가지 마라”며 “북한여성들이 언론에 의해 순종적이고 전통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이미지화 돼있는데, 만나보면 씩씩하고 의사표시도 잘한다”고 말했다.
이 대회는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통일연대, 민화협, 7대 종단 등이 주축이 되어 16∼17일까지 금강산 김정숙휴양소에서 열렸다. 여기 참석한 여성들은 모두 각각의 단체에 소속돼 있으면서 교수, 변호사, 의사, 기자, 정치인, 경제인,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서울에서 제주까지 지역도 고루 분포돼 있었다. 충북에서는 기자와 충북여성민우회 변지숙 대표 및 이현희 사무국장이 참석했다.

“북방한계선을 넘었습니다”

목적지까지는 비행기로 가면 금방 날아갈 길이지만 서울에서 속초까지 4시간, 속초에서 고성까지 4시간 등 8시간이 걸렸다. 더욱이 이 대회는 북측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일정을 확정짓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연기가 되는 바람에 방북단은 배도 금강산을 오가는 전용배를 차지하지 못했다. 단풍구경을 떠나는 금강산 여행객들이 많아 주최측은 갑작스럽게 배를 전세내 올 수밖에 없었던 것. 숙소 또한 예약을 못해 행사 기간 내내 배 안 객실에서 먹고 자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북으로 간다는 설레임은 컸다. 배가 고성으로 가는 도중, 안내방송이 나왔다. “여러분이 타고 계신 배가 지금 막 북방한계선을 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진촬영이나 비디오 촬영이 금지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와∼하며 갑판으로 나가 손을 흔들며 환호했지만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은 망망대해, 물 뿐이었다. 휴대폰도 저절로 꺼져 작동이 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붉은 글씨였다. 거기에는 ‘금강산 관광객들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고 씌여 있었다. 역시 북한다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국신고 절차는 신분증과 ID카드를 내밀자 마르고 짧은 머리를 한 북한 남자들이 표정없는 얼굴로 도장을 찍어주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금강산은 ‘현대 판’ 이었다. 모든 직원은 현대 사람들이고 버스도 현대차였다. 우리는 현대차를 타고 현대가 만든 금강산 온천으로 직행했다. 여기서 쓰는 돈은 일체 달러만 통용됐다. 그래서 모든 물건 값이 비싼 편이었다. 온천 한 번 가는데도 12달러나 들었다. 온천 물은 미끄러운게 손에 닿자 느낌이 좋았다. 특히 노천온천은 경치가 기막히게 아름다웠다. 오른쪽으로 쭉쭉 뻗은 소나무의 자태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둥근 보름달이 떠있는게 한폭의 수채화 같았다. 이 날 남측대표단은 금강산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온정각 앞 마당에서 각자의 손바닥을 그림물감으로 찍고 간단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만들어 공동만찬 때 기념품으로 전달했다.

대회장 입장할 때는 가슴뛰어

16일, 대회 날이 나가왔다. 온정각 앞에 모인 우리는 아침 9시부터 김정숙휴양소로 입장을 시작했다. 여성 밴드부들이 통일노래를 연주하고 한복을 입은 북측 여성대표들과 어린이들이 모두 일어서 박수를 쳤다. 단상에서는 TV 뉴스에서 보던 대로 소프라노 톤의 북측 대표가 “남조선 여성들이 통일을 하기 위해 한걸음으로 달려왔다” “여성통일운동이 민족자주 통일운동의 한 축을 구성할 것이다” 등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측 대표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 행사기간 중 이 때가 가장 가슴이 뛰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쪽 땅을 밟았다는 흥분과 이 쪽 여성들을 직접 만났다는 신기함,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같은 동포라는 감정이 모두를 그렇게 만들었다. 대회장 단상에는 붉은 글씨로 ‘6·15 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북남녀성 통일대회’ 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통일된 조국을 후대들에게’ ‘북과 남의 녀성들이 단결하여 조국통일을 앞당기자’ ‘6·15 공동선언의 기치밑에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자’는 등의 구호가 눈길이 닿는 곳마다 있었다.
이 곳에 와서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구호가 많다는 것이다. 금강산 바위에는 ‘천출의 명장 김일성 장군’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 등이 쓰여있고 김정숙휴양소 출입구에도 ‘자력갱생 강성대국’이라는 붉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그 단단한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을까 상상을 해보았지만, 넓고 반반한 바위에는 거의 예외없이 구호가 있었다.
남측 대표 350명, 북측 대표 300명, 해외 20여명 등 670여명이 참석한 통일대회는 실로 규모가 큰 행사였다. 북측 참가자들도 가장 큰 여성조직인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 출판사 사장, 방송국 국장,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학자 등으로 대부분 상류층이라는 것이 참석자들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 남측 참가자 모씨는 “평범한 북한여성을 만나고 싶은데 이런 대회는 양측이 선발한 집단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양측 여성들이 대회 기간동안 함께 한 행사는 수예 및 미술전시회, 유희·오락경기, 만찬, 합동예술공연, 부문별 상봉모임, 금강산 공동산행이다. 유희·오락경기 때는 양측 대표들이 아무런 부담없이 운동회를 했기 때문인지 어느 행사보다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운동회가 끝나자 양측 대표들은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는 하나’ 라는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을 몇 바퀴 돌기도 했다.

외래어쓰자 “그게 무슨 뜻이냐”

북측에서 온 여성들과는 언제든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제지를 하지 않는다는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화 내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선 우리말에 많이 들어있는 외국어, 외래어를 쓰면 북측 여성은 그게 무슨 뜻이냐며 정색을 하고 묻는 바람에 대화가 단절되곤 했다. 우리말에 외래어가 많다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북측의 한 기자는 “우리는 외국어를 쓰면 민족주체성이 없다고 사람들이 비난해 한마디도 쓰지 못한다”고 말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체제에 관한 이야기와 개인 신상에 관계된 것도 서로 피하는 분위기였다. 북측 여성들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면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회피하기 일쑤였다. 부문별 상봉모임을 할 때는 가벼운 말씨름도 있었다. 이 모임은 전체 참가자들을 여성단체·경제·의료 보육·교육·문화예술 등으로 나누고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런데 그 쪽에서 ‘위대한 김일성 수령’에 관한 이야기만 계속하자 우리측에서 말을 자르자 충돌한 것. 하지만 상봉모임을 1시간으로 제한, 서로간 깊이있는 토론이 되지 못해 아쉽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16일에 있었던 환영만찬은 북측 대표들이 우리를 위해 금강산여관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한 테이블에 북측과 남측 대표가 4명씩 앉아 자유롭게 대화하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북쪽의 음식은 대체로 담백했다. 조미료나 향신료, 양념을 많이 넣지 않았다. 그래서 남측의 기름지고, 자극적이며, 양념이 많이 들어간 음식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맛이 없었다는 평이고, 담백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접시와 컵, 그릇 등의 집기는 우리의 70∼80년대 것을 연상케 했고, 과일을 깎지 않고 통째로 칼과 함께 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북측대표, 남녀평등 ‘자랑’

만찬 때 기자 옆에 앉았던 조선민주여성동맹 산하 보육책임자인 북한 여성은 보육문제 만큼은 국가가 확실하게 책임져 모든 여성이 일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실제 그 곳은 인민학교에 들어가는 7세 전까지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모든 아이를 맡아 키워 사정에 따라 주말에만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에서는 남녀평등이 얼마나 이루어졌느냐고 이 여성에서 묻자 그는 “매년 7월 30일이 남녀평등권 법령의 날이다. 이런 법이 있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것이다”며 모든 직장과 가정에서 남녀평등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강조했다.
부문별 상봉모임 때도 북측 대표들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여성이 21%를 차지하고 있는데 남조선은 6%에 불과하다. 경공업과 상업 부문 대표는 거의가 여성이고 기타 기관이나 업체 대표, 지배인, 위원장을 맡은 여성도 많다”며 우월감을 표시했다. 단어 한 개를 가지고 입씨름을 하기도 하고, 같은 민족이면서 서로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촌극도 벌어졌지만 남북여성통일대회는 의미있는 행사였다.
주최측에서는 남북간에 치른 여느 행사가 의견충돌로 지연되곤 했던 것과 달리 이번 대회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대회 성사를 위한 실무협상은 무려 1년 반이나 걸렸지만, 여성계 전반이 참여한 범여성대회라는 다소 까다로울 수 있는 조건을 가진 행사를 별 차질없이 마칠 수 있었던 것을 하나의 성과로 꼽았다. 특히 여성들이 남북민간교류의 주체가 되어 경험을 나누는 행사가 됐으며, 양측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허무는데도 일조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있게 들어가도 양측은 체제와 사는 방법이 달라 이질감은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마지막 행사로 찾아간 금강산은 매우 아름다웠다. 쭉쭉뻗은 소나무와 가지각색의 단풍은 절정을 맞고 있었다. 한마디로 만산홍엽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복잡해도 자연은 그렇게 단순하게 아름다웠다. 금강산에는 휴지 한 개 떨어져 있지 않고, 얼굴이 비칠 정도로 물이 깨끗했다. 혹시 누가 휴지를 버리지 않는지 안내원을 비롯한 수많은 북측 관계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게 아닌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이라는 노래가 절로 나오는 시간이었다. 오고 가는 시간까지 합쳐 4일간의 북한방문은 이렇게 끝이 났다. 마치 짧은 시간동안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남북여성교류 그동안 어떻게 진행됐는가

350명이라는 대규모의 여성들이 일시에 북한을 방문한 것은 분단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남북 여성들의 만남은 몇 차례 있었다. 1991∼1993년까지 동경과 서울, 평양에서 4차례에 걸쳐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열어 얼어붙었던 남북민간교류 물꼬를 텄다. 이 토론회는 최초의 남북여성교류이면서 동시에 판문점을 통해 오고간 최초의 민간교류였다.
하지만 동경토론회 이후 남북의 교류는 단절됐고, 단지 평양토론회에서 남북여성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합의됐던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교류만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중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변화된 통일환경 속에서 양측의 만남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2001년, 2002년 여성들은 6·15와 8·15 민족공동행사에 참여하여 상봉모임을 가졌다. 그 중 2001년 남북여성 100여명은 평양에서 ‘6·15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여성통일대회’를 개최하고 계속해서 교류행사를 갖기로 합의했다.
지난 2000년 남북 정상 사이에 합의된 6·15 공동선언 내용은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적 인정과 이 방향의 통일지향, 이산가족상봉·친척방문단 교환·비전향장기수문제 해결 등 인도적 문제 조속 해결, 민족경제의 균형발전과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의 활성화 및 신뢰구축, 합의사항실천을 위한 당국간 대화 개최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 등이다.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의 목적은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여성의 역할을 확인하고, 이 대회를 계기로 향후 통일과정에서 남북여성들의 참여를 높이는 것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 그리고 토론회, 수예 및 미술전시, 유희·오락경기, 공동연회, 부문별 상봉모임, 합동예술공연, 금강산 공동산행을 통해 남북여성의 하나됨을 확인하고 따스한 자매애를 나누는 것도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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