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94년 10월에 체결한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를 파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뉴욕 타임스>지가 보도한 지 하루만인 10월 20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북한측의 핵개발 시인으로 제네바합의는 파기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대다수 서방언론은 마주 달리는 북미 ‘핵 열차’가 ‘2003년 위기설’의 실현을 향해 치닫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같은 위기론은 일단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시인함으로써 ‘신뢰’(제네바 합의)가 깨졌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신뢰의 증표인 경수로 착공이 늦어지자 북한은 지난 99년 12월부터 이미 외무성 대변인 및 <노동신문> 논평 등을 통해 전력손실 보상과 대북 적대정책의 변경을 요구하면서, 제네바협정은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상호간의 신뢰가 깊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국가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상호 방어적’이며 ‘상호 타협적’인 합의였던 ‘제네바 기본합의’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를 흔든 것은 ‘약소국’ 북한이 아니라 ‘초강대국’ 미국이었다. 북한으로서는 ‘재수 없는 일’이지만, 94년 10월 기본합의를 체결하자마자 그해 11월 북한을 불신하는 공화당이 미 의회의 다수파가 됨으로써 기본합의는 도전받기 시작했다.
제네바 합의 기본틀의 미국측 의무는 ▲ 2003년을 목표시한으로 북한에 2000㎿ 경수로 제공 ▲핵동결 대가로 매년 중유 50만t 제공 ▲합의 3개월 내 무역·투자제한 완화 ▲연락사무소 설치 및 대사급 관계 수립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위협·불사용 보장으로 요약된다. 반면에 북한측 의무의 골자는 ▲합의 당시 가동중이거나 건설중인 핵시설 동결 및 신규건설 포기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이행 ▲경수로 핵심부품 인도 전 핵안전조치협정 전면 이행 ▲사용후 연료봉 제3국 반출 및 동결된 핵시설 해체로 요약된다.
그러나 2003년까지 제공키론 한 경수로 건설사업의 경우 2008∼2009년에나 완공이 가능할 만큼 공정이 더디다. 그래서 북한은 물론 한국 내에서도 미국이 목표시한을 2003년으로 정한 것은 그때까지 북한 정권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북한 붕괴 가설을 상정한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었다. 핵개발 계획 시인으로 핵문제가 다시 불거진 이후 조선 평양방송이 10월 21일 “제네바 합의의 핵심 사항인 경수로 제공이 늦어진 것은 미국측의 합의 위반”이라며 미국의 성실한 제네바 합의 이행을 촉구하고 나선 것도 이런 근본적 불신을 반영한 것이다.
또 북한은 체제생존을 위해 미국의 무역·투자제한 완화를 강력히 원하지만 95년 1월 상징적 수준의 대북 제재완화 조처와 99년 9월 적성국 교역법 등에 근거한 제재 일부 완화조처에 머물러 있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북한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 올려놓고 핵심 품목과 기술 수출입을 규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의회 승인사항도 계속 규제해왔다. 연락사무소 설치 및 대사급 관계수립은 감감 무소식이다.
물론 북한측도 ‘우라늄 고농축 프로그램’으로 예상되는 핵개발 계획을 시인함으로써 핵시설 동결 및 신규건설 포기 합의를 위반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북한이 합의를 위반할 수 있는 여지와 원인을 제공한 측은 미국이다. 미국측이 북한의 ‘우라늄 고농축 프로그램’ 가동 시점을 99년으로 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북한은 99년 12월부터 외무성 대변인 및 <노동신문> 논평 등을 통해 제네바협정은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핵개발 계획 시인과 ‘제네바합의 무효화’ 발언은 ‘판 깨기’가 아닌 ‘협상용’임을 암시한다. 이는 곧 북미협상에서 북한이 핵 개발 계획 시인하고 협상 조건으로 선제공격을 말 것과 체제인정, 평화협정 체결을 내세운 만큼 ‘공’은 미국 쪽에 넘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0월 21일 정세현 장관급회담 남측 수석대표에게 “우리도 최근 사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용의가 있다면 대화를 통해 안보상의 우려 사항을 해소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그 무엇보다도 북한의 핵개발 계획 시인을 계기로 대다수 언론은 한반도에 큰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평양의 표정은 여유롭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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