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민주당에는 ‘총선파’와 ‘대선파’가 있다

번식지와 월동지를 오가는 조류. 철새의 사전적 의미다.
그렇다면 금배지와 금배지를 오가는 포유류는? ‘철새정치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다. 흔히 대의명분이나 정치철학에 기반하지 않은 채 개인적인 이해 관계에 따라 이 당 저 당을 떠돌아다니는 정치인을 철새에 비유한다. 마치 철새가 살기에 적당한 온도와 습도, 먹이 등을 찾아 이동하듯이 철새정치인들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새와 철새정치인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철새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반면, 철새정치인은 정치의 순리에 역행한다. 또한 철새는 아무리 먼 길을 비행하더라도 노선을 이탈하지 않고 정확히 목적지에 도달한다. 반면 철새정치인은 아무리 짧은 길을 가더라도 실리나 기득권 얻기 위해 노선이나 목적지를 과감히 변경한다. 이런 차이를 아는 이들은 ‘철새정치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철새 모독’이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현재 민주당에는 보스·계보 정치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동교동계니 이인제계니, 탈당파니 왕당파니 하는 분류가 사라지고, 오로지 ‘대선파’와 ‘총선파’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선 결과와 상관없는 지역구이거나 다음 총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12월 대선에 매진하는 대선파와 오로지 2004년 총선에 대한 결과 예측을 통해 자신의 행보를 결정하는 총선파로 나뉜다는 것이다. 냉소가 가득 담긴 우스갯소리지만, 결과적으로 철새정치인들의 정류장이 돼 버린 민주당의 현주소를 극단적으로 희화화한 것이다.
2002년 10월 정치철새들의 대이동을 예고하는 첫 신호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쏘아 올려졌다. DJ정권 아래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던 한승수 의원이 10월 9일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그는 DJ정권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햇볕정책’의 조타수를 맡았던 탓에 일각에서는 “기존 정치철새들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한승수 의원,
철새 대이동 예고

한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하던 날, 기자들로부터 ‘DJ정권과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에 큰 차이가 나는데…’라는 질문을 받고는 곤혹스러워하며 “대북정책은 통일부 소관이고, 외교통상부는 대외정책을 담당한다. 나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초당적인 입장이었다”고만 답했다.
‘DJ정권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고 UN총회 의장까지 지낸 사람이 정권 말에 한나라당으로 옮긴 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는 김대중 정부뿐만 아니라 노태우 대통령 때 상공부 장관, 김영삼 대통령 때 주미대사로 국가를 위해 일해왔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이어 “한나라당은 정치를 처음 시작한 나의 정치적 뿌리이기 때문에 고향에 돌아온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발을 디딘 한 의원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탈락하자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국민당으로 옮긴 뒤 다시 무소속을 거쳐 한나라당에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아니 전형적인 정치철새의 논리대로 “낯설지 않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한 의원이 쏘아 올린 신호탄은 때를 기다리던 철새들에게는 앞을 밝혀주는 조명탄 역할을 했다. 10월 14일 충청권의 전용학(민주당)·이완구(자민련) 의원이 한 의원의 뒤를 이어 한나라당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이 두 의원은 한때 민주당과 자민련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을 맹렬히 비판했던 ‘이란성 쌍둥이’ 철새였다.
전용학 의원은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지난해 10월 18일 김용환·강창희 자민련 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하자 “내각제 개헌론자인 김·강 의원이 대통령제만을 고집하는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에 안긴 것은 추악한 배신과 야합”이라며 이회창 총재를 겨냥해 “명분과 정치도의를 저버린 행위로 국민적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변인 출신 두 의원의 한나라행

또 전 의원은 “한나라당과 이 총재는 국민분열 정치에 의존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사회혼란과 국론분열 조장세력” “이 총재는 냉전수구적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반통일 정치를 하고 있다”는 등의 강도 높은 비판 논평을 자주 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국론분열·냉전수구 세력의 품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전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원내 안정세력,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당만이 정치안정을 이룰 수 있다. 이회창 후보의 집권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라고 확신한다”며 전직 대변인답게 달콤한 ‘립 서비스’로 인사말을 건넸다.
초선인 전용학 의원은 3·4선급 선배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발 빠른 철새 행각을 벌여왔다. 그는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자민련 공천에서 탈락하자 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지난해 당 대변인으로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에 맹공을 퍼붓던 그는 올해 국민경선 때는 이인제 의원의 대변인을 맡아 ‘색깔론’과 ‘음모론’으로 노무현 후보를 공격했다.
노무현 후보가 국민경선에서 승리하자 그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며 노 후보의 언론특보를 맡았다. 노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민첩하게 반노(反盧)그룹이 주축이 된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로 옮겼고, 후단협이 내부 이견으로 복잡해지자 그 공백을 틈타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재선인 이완구 의원도 노련한 철새답게 차기 충남도지사 후보 자리를 약속 받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는 소문이다. 이 의원은 지난 96년 총선 때 신한국당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뒤, 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자 그 이듬해 DJP 공동정권의 한 축인 자민련으로 옮겨 대변인·원내총무 등 핵심 요직을 두루 섭렵한 뒤 최근 전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에 ‘복당’한 특급 철새정치인이다.
때아닌 ‘철새들의 대이동’은 이미 정치권의 이상 기온에서도 예고되었다.
지난 9월 30일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선대위 출범식에는 우리나라 정당 역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현역 의원들은 전체 110여 명 가운데 40여명 선으로 3분의 1에 불과했다. 여당 대통령 후보 선대위 출범식에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원들이 불참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더 희한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10월 7일 이한동 전 총리는 정당도 없이 ‘단기필마’로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이 자리에는 노 후보 선대위 출범식 때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최명헌·박상규·장재식·이윤수·전용학·곽치영·박병윤 등 민주당 현역 의원이 18명이나 참석해 취재기자들조차 의아해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행사장에서 이 전 총리에게 ‘은인자중하던 호랑이’ ‘숨겨진 다이아몬드’라며 자기 당 후보에게 해도 낯간지러운 미사여구를 쏟아냈다. 또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난 10월 16일 정몽준 신당인 ‘국민통합 21’행 티켓을 끊고, 민주당 탈당을 선언하는 등 예정된 수순을 밟았다.
반노그룹이 의원들을 규합해 집단적인 대이동을 꾀하는 것은 어찌 보면 ‘정치적 신념’에 따른것이어서 일반 철새들로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당적을 유지한 채 낮에는 자기 당 후보를 흔들고, 밤에는 다른 당 사람들과 작전을 모의하는 식의 ‘이중 생활’은 정치철새들의 전형적인 행태와 다름없었다.
여러 차례 탈당을 공개 선언했던 후단협 등 반노그룹에 선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원유철·송영진 등 97년 신한국당에 있다가 이인제 의원의 국민신당에 결합했다가 지금의 민주당으로 왔거나, 박종우·김명섭 등 한나라당(신한국당)이 야당이 되면서 여당인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사람들이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고향행 또는 타향행을 준비하는 철새인 셈이다.
민주당 선대위와 반노그룹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10월 17일 김민석 전 의원은 “모든 힘을 모아 승리하여 과거회귀를 막고 크게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대의이고 명분”이라며 민주당을 탈당해 국민통합 21에 합류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6·13 지방선거 때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였고, 민주당내 386 정치인의 대표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어서 적잖은 충격파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시장선거 당시 “(지방선거는) 노무현이냐 이회창이냐의 서곡”이라며 “원칙을 인정할거냐, 탈법과 편법을 인정할 거냐”고 밝히며 한 표를 호소했다. 그런 그가 몇 개월만에 ‘지지율’에 근거해 정체성이 다른 두 후보의 단일화가 대의이자 명분이라고 한 데 대해 뜨거운 찬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찬반 논쟁은 ‘김민석 전 의원의 철새 행각에 대한 유무’를 가리는 것이기도 하다.
한 정치평론가는 현재 민주당의 이합집산과 대이동에 대해 “원래 해빙기에는 땅이 질퍽거리기 마련”이라며 “질퍽거리는 땅 옆에는 꽃이 피고 새도 우는 게 자연의 순리”라며 이같은 진통이 또 다른 면에서는 허약한 민주당의 체질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과연 이들이 얼어붙은 정치 동토를 알리는 ‘겨울철새’였는지, 아니면 내재된 신록의 푸름을 알리는 ‘여름철새’였는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