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법안발의 1건뿐인 ‘낙제점 의원’… 바깥으로만 돌았다

정몽준 의원은 지난 9월 17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함과 동시에 대통령 후보로서 검증받아야 할 시험대에 섰다. 정 의원은 ‘정치개혁’과 ‘국민통합’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가 내건 명분들을 무색하게 하는 ‘과거사들’도 적지 않다. <주간 오마이뉴스>는 네 차례에 걸쳐 정 의원과 관련된 ‘의혹들’을 세세하게 짚어본다. <편집자>

정몽준 의원은 88년 13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그는 37살이었다. 그동안 민자당과 국민당에 잠시 몸담은 적도 있지만 대부분 무소속으로 지냈다. 그런데 4선의 중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만한 의정활동은 거의 없다. 최근 <포브스>지가 “의정활동에서는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으나 오히려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더 유명해졌다”고 정 의원을 평가한 데서 부진한 의정활동의 원인을 보여주는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실제 의정활동을 감시해온 시민단체들의 평가를 보면 정 의원의 의정활동 성적은 ‘낙제점수’에 가깝다.
먼저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이 96년부터 98년까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을 분석한 평가서에 따르면 정 의원은 100점 만점에 96년 54.1점, 97년 47.3점, 98년 54.0점을 얻었다(평균 51.8점). 당시 2회 이상 종합점수 60점 미만을 기록한 의원들로는 권익현·김상현·김용환·김윤환·김정수·김종호·심정구·이한동·정재문·현경대·황낙주 등 당시 4선 이상의 중진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특히 정 의원은 불명예스럽게도 김복동·김윤환·김종호·김태호·이동원·이한동·장영철·정재문·황낙주 의원 등과 함께 3회 모두 60점 미만인 의원들 속에 포함됐다.

정몽준도 철새정치인? … 법안 날치기 경력

▶ 법안 날치기 경력
원내중심 정치를 지향한다는 정몽준 의원에게도 날치기 경력이 있다. 정 의원은 3당 합당 직후인 90년 3월 민자당에 입당해 91년 국회 경제과학위원회 민자당 간사를 맡았다. 그는 91년 11월 27일 쟁점법안 5가지를 날치기 처리했다. 거대여당이던 민자당은 91년 11월 26일과 27일 추곡수매동의안과 바르게살기운동조직육성법안 등 쟁점법안을 주요 상임위에서 무더기로 날치기 처리했다. 경제과학위원회 소속 민자당 의원들은 11월 27일 10시 32분 문을 걸어 잠그고 간사였던 정 의원의 사회로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법안·예산회계법 개정안 등의 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민주당 소속의원들은 의원총회에 참석하느라 신범순 위원장만이 위원장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민자당에서 쟁점법안을 날치기 처리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회의장으로 달려가 문이 잠긴 회의실 문을 발로 차며 거치게 항의했지만 쟁점법안은 이미 처리된 상황이었다. 91년 11월 28일자 <한겨레>는 이렇게 보도했다.
“전날부터 기금관리기본법안 문제로 여야 대치상태를 계속해 온 경과위는 애초 오후4시로 개회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여당의 정몽준 간사 등 소속의원들이 오전 10시32분 민주당 소속 신순범 위원장과 김태식 의원 등을 따돌리고 회의실로 곧바로 갔다. 신 위원장 등이 걸어 잠근 회의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자 정 간사는 재빨리 폐회를 선포하고 도망치듯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신 위원장은 ‘간밤에 날치기를 할까 봐 회의실 문을 모두 잠그고 열쇠꾸러미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면서 ‘아침에 여야 의원들이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어이없이 날치기를 당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국회 회의록을 보면 정몽준 간사는 “의사결정은 배부해 드린 유인물에 따라 제1항부터 제4항까지 일괄 상정합니다. 소위 심사보고는 서면으로 대체하고 의결하겠습니다. 소위 심사보고서대로 의결하고자 하는데 이의 없습니까?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라며 2분만에 쟁정법안들을 날치기 처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정 의원이 초선의원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개인적 소신이 아니라 민자당 지도부의 명령에 따랐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정 의원은 아무 말이 없다.

▶ 정몽준의 철새 행적
요즘 여의도 정가는 정치권의 이합집산으로 시끄럽다. 이념과 노선에 의한 행동이라기보다 ‘대세추종주의’의 인상이 짙다. 정몽준 의원은 애초 “배신과 부패의 정치인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최근 현역의원 영입에 적극 나설 것으로 표명하면서 ‘묻지마 영입’에 동참하고 있다. 정 의원 역시 과거 철새 행적이 없지는 않았다.
정 의원은 88년 13대 총선 때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하지만 3년 뒤 거대여당이던 민자당에 입당했다. 정치적 야합으로 비난받았던 3당 합당 직후인 90년 3월이었다. 당시 민자당 쪽에서는 “정 의원이 먼저 입당 의사를 밝혀 왔다”고 주장했으나 정 의원은 “당시 무소속이 두 명뿐이었고, 친하게 지내던 고 김동영 의원의 권유가 있어 입당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당시 민자당은 거대여당으로 국회의원 한 석이 아쉬운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초선의원이던 정 의원이 자발적으로 입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민자당 소속 의원도 잠깐이었다. 정 의원의 부친인 정주영 회장이 92년 1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자 재빨리 민자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에 입당했다. 91년 11월까지만 해도 민자당을 위해 날치기 법안처리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다. 국민당에 입당한 그는 정책위 부의장과 부산·경남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부친의 당선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대선 패배 이후 국민당이 공중 분해되면서 그 역시 국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돌아왔다. 이후 줄곧 무소속으로 지내던 정 의원은 2000년 김용환 의원이 ‘한국신당’을 창당하자 그곳에 참여할 뻔하다가 막판에 발을 뺐으며, 권노갑 고문을 만나 민주당 입당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즉 정 의원 스스로도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정치권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국민통합21’에 찾아드는 ‘정치철새들’을 보면서 정 의원이 무슨 생각을 할지 무척 궁금하다.

96년 의정활동 298명 중 290위

또한 15대 국회 원년인 96년의 의정활동을 평가한 경실련 평가서에서도 정 의원은 하위그룹에 속해 있다. 당시 경실련은 입법감시단의 감시활동과 방대한 양의 속기록을 분석해 의정활동을 평가했는데 의정활동 하위그룹은 총 97명(201위∼298위)으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의 3개년 평가보고서에서 ‘2회 이상 종합점수 60점 미만’에 포함됐던 의원들로는 정 의원(290위)을 포함 김태호(250위)·장영철(254위)·김복동(264위)·이한동(269위)·황낙주(270위)·정재문(277위) 의원이다. 정 의원은 298명 의원들 가운데 290위를 차지함으로써 불성실한 의정활동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경실련의 99년도 의정활동평가서에서도 정 의원은 242위를 차지해 여전히 부실한 의정활동을 드러냈다. 상임위(통일·외교·통상위원회) 평가에서도 24명의 위원 가운데 15위를 차지했다. 정 의원은 2000년 평가(2000년 6월 5일부터 2001년 1월 9일까지 임시국회 4회와 정기국회 1회를 포함 총 5회기의 활동)에서도 박근혜·박상천·이창복·유흥수 의원과 함께 ‘다소 부진’(800점 만점에 144∼179점을 받은 그룹)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물론 정 의원 쪽은 “월드컵 유치 등을 위해 동분서주한 점을 감안하지 않고 통상적인 잣대로 의정활동이 부실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했다.
당시 평가에서 정 의원은 발의한 법안이 한 건도 없었으며 설문조사 역시 한번도 실시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정책자료집도 내지 않았고 청원소개도 전혀 없었다. 다만 한일관계와 남북문제를 주제로 하는 토론회에 3회 참여했을 뿐이다. 여성특위와 미래전략특위뿐만 아니라 국회내 연구모임(국회사이버정보문화연구회, 21세기문화정책포럼, 국회환경포럼)에도 참여하고 있지만 특별한 성과는 보여주지 못했다.
국회의원의 출석률은 의정활동의 성실성을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지표다. 경실련 시민입법위원회는 지난 99년 ‘국회의원 본회의 출결석 분석’이라는 조사내용을 공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조사였다. 공개 당시 시민입법위원회는 “의정활동의 가장 기본이 되는 회의 출석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국회의원 개개인에 대한 의정활동의 성실성 여부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불성실한 의원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엄중한 심판을 통해 보다 질높은 의정활동이 가능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조사기간은 98년 12월 24일 오전 10시부터 99년 2월 22일 오후 2시였다.

총선연대 낙선운동 대상자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본회의가 열릴 때마다 평균 27.3%에 해당하는 의원들이 결석을 했으며 의원 1인당 평균 두 번 이상 결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덟 차례 열린 본회의에 모두 참석한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 의원은 여기에서도 ‘출석률 50% 미만’에 포함되었다. 정 의원을 비롯해 김복동·정재문·김윤환 의원 등이 결석률이 높은 의원들로 꼽혔다. 특히 정 의원은 김복동·정재문 의원과 함께 8회 열린 본회의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는 진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당시 정 의원과 김윤환 의원은 ‘무단결석’이 7회에 달해 ‘불성실 의원’의 쌍벽을 이루었다.
또한 경실련 시민입법국에서 조사한 2000년과 2001년(2000년 6월 5일∼2001년 3월 31일) 국회의원 출결석 현황에 따르면 정 의원은 47%의 본회의 결석률을 나타냈다. 본회의와 상임위를 합친 결석률에서도 정 의원은 84회차 중 38회(45%)나 결석해 불명예스럽게 이한동 의원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시민입법국에서는 “외국의 경우 결석률이 높을 경우 월급·수당이 삭감될 뿐만 아니라 의원직까지도 박탈하는 경우가 있다”며 우리나라의 경우도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정 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불어닥친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 대상자로 지목되는 치명타를 입었다. 총선시민연대에 의해 ‘낙선운동 대상자’에 오른 것이다. 당시 총선시민연대가 정 의원을 낙선운동 대상자로 지목한 이유는 이렇다.
“92년 대선 직전 부산 지역기관장들이 모여 대선 대책 등을 논의한 초원복국집 사건과 관련, 범인은닉혐의로 기소된 점(선고유예). 4년간 법안발의 1건, 결석률 82.46%.”
총선시민연대는 “월드컵 준비로 인해 의원직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다면 출마하지 말고 월드컵 준비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 의원측은 당시 반론을 통해 “국회 불출석 사유는 2002년 월드컵 준비 관련 해외출장과 국내행사 때문”이라며 “국회 내에도 월드컵 지원특별위원회가 있고, 본인도 특위 위원”이라고 해명했다. 정 의원은 지난 9월 25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 토론자가 “정치인에게는 의회 활동이 중요하다. 시민단체에서 의정활동 성적을 매긴 것을 보면 정 의원은 290여명 중 최하위였고, 법안 발의도 그렇고, 결석률은 82.5%다. 부끄러운 점수 아니냐”고 하자 정 의원은 따지듯 이렇게 반박했다.
“15대 국회 본회의의 80%는 일당의 요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소집된 방탄국회, 절름발이 국회라는 통계가 나왔다. 무소속이므로 그런 본회의에는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시민단체는 나 같은 무소속 의원을 야단칠 게 아니라 국회를 공전시킨 여야 책임자를 엄격하게 야단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경필 한나라당 대변인은 “방탄국회는 4번밖에 없었고 그 경우 아예 출석률 계산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며 “주요 표결 때 본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은 ‘DJ 양자’다운 완전 거짓말”이라고 정 의원의 해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럼에도 정 의원은 16대 총선에서 61.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중앙일보> 9월 23일자는 정 의원의 부진한 의정활동과 높은 지역구 지지율의 함수관계를 보여주는 단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방탄, 절름발이 국회 갈 필요 없었다”

“정몽준은 15대 때는 합동유세에도 참석하지 못한 적이 있다. 총선이 있던 96년 1월부터 선거운동이 공식 시작된 3월 26일까지 10차례에 걸쳐 8개국을 방문했다. 투표 당일 귀국해 투표하고 곧바로 출국해 개표결과도 못봤지만 14대와 비슷한 71%의 지지를 받았다. 그가 내리 4선을 한 울산 동구엔 복지회관과 잔디구장이 각각 7개다. 모두 현대중공업이 비용을 댔다. 현대중공업은 동구에서 여성주부대학 등의 복지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한때는 이곳에서 ‘정몽준이 총선에 떨어지면 현대를 울산에서 옮길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는 곧 현대중공업이 없었다면 울산에서 정 의원이 내리 4선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란 얘기다. 이는 또한 정 의원의 독자적인 의정활동은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뜻한다. 동료의원들조차 정 의원의 의정활동이 빈약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음은 9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 중 일부다.
“지난 2년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활동을 같이 한 민주당 의원은 ‘월드컵 때문이겠지만 회의시간에 제대로 맞춰 온 적이 거의 없고 자신의 발언이 끝나면 곧바로 자리를 뜨곤 했다’고 말했다. 같은 기간 중 통일외교통상위를 함께 했던 한나라당의 한 의원도 ‘정부가 제출한 보고서의 자잘한 문구의 표현을 문제삼으며 정색을 하고 장시간 장관을 호통치는 것을 보고는 ‘문제의 본질은 저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통일부의 한 국장도 ‘가끔 지엽말단적인 것을 물어보는 등 흐름에서 벗어나고 자료축적도 잘 안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총선 출마 않고 월드컵 전념했더라면…

정 의원은 심지어 90년 초 의원 신분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일본에서 살다시피했다. 스스로 이 때문에 의정활동이 미진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게다가 14년간의 의정활동 동안 대표 발의한 법안도 ‘외국 대리인 로비활동 공개에 관한 법률안’을 비롯해 4건에 불과하다. 또한 국정감사시민연대는 2000년 11월 발표한 국정감사 종합평가서에서 정 의원을 ‘워스트 의원(최악의 의원)’으로 선정했다.
정 의원은 스스로 국민들이 자신을 국회의원(정치인)보다는 월드컵 유치를 성공시킨 축구협회장(월드컵조직위원장)이나 재벌회장을 아버지로 둔 ‘재벌 2세’라는 인상을 받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정 의원은 사실 93년 한국축구협회장을 맡고 94년 FIFA 부회장에 선출되면서 정치보다는 축구와 관련된 활동에 시간을 투자했다. 특히 96년 월드컵 공동개최가 발표되고 정 의원이 2000년 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으면서 국회의원직은 유명무실해졌다.
한 일간지는 “90년대 정몽준의 삶은 축구협회장과 월드컵 유치 및 조직위 활동 등 온통 ‘축구’로 채워져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 의원도 스스로 “10년간 월드컵 유치를 위해 장거리 비행기를 타다가 승합차를 탄 지 얼마 안됐다”고 얘기할 정도다. 그렇다면 정 의원은 굳이 의원직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2000년 16대 총선 전 총선시민연대의 ‘권고’대로 성공적인 월드컵 준비를 위해 출마를 하지 않았더라면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한 지금 오히려 자신에게 부정적인 검증기준의 가짓수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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