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반시설이 열악하던 1960~70년대는 이른바 극장의 전성시대였다. 텔레비전 보급이 미흡했던 당시, 극장은 문화예술의 전당이요 은밀한 데이트 장소였다. 007 시리즈를 비롯하여 마카로니 웨스턴 시리즈와 중국 무술영화가 뒤를 이었던 극장은 문화에 대한 욕구를 푸는 유일한 장소였다.

원래 극장과 영화관은 그 차별성이 있으나 초창기 우리나라 극장은 영화도 상영하고 일정한 무대도 갖춰 악극, 여성국극, 그리고 ‘쇼(Show)’라고 일컫는 악극단도 수용하는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영화관이라는 말보다는 무슨 극장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다.

이창구 전 청주대연극영화과교수가 펴낸 ‘충북연극100년사’에 따르면 청주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극장은 1914년에 일본인 도꾸나가 소베에(德永 增兵衛)가 개관한 도꾸나가사(德永座)로 기록된다. 떠돌이 처지였던 도꾸나가는 청주 흥행에서 실패하여 발이 묶이게 되었는데 이때 방인혁이 거금 230원을 희사했다고 한다.

이어 1917년 야요이 정(相生町:현 신라예식장 부근)에 사꾸라사(앵좌:櫻座)가 문을 열었다. 이것은 신축사업을 발기한 헌병대장 사꾸라이 소좌(櫻井 少佐)의 성자(姓字)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는 민영은 방인혁 등 한국인 2명과 일본인 유력자 등 7명이 연대보증인으로 하여 소요자금 600원을 은행융자로 충당하였다.

그후 사꾸라사는 식산은행 옆(현 남문로 1가 예술사진관 자리)으로 옮겼고 운영권은 소방대에 있었다. 1930년대, 무성영화 제작이 활기를 띠며 청주극장이 본정 2정목(철당간 앞)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청주에서 처음 등장한 영화관으로 일본식 명칭이 아닌 우리 명칭을 사용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한편 음성에는 내좌(內座)라는 극장이 1920년에 들어섰고 영동에서는 읍내 구세군회관이나 청년회관 등을 사용하여 연극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증평에서는 1930년도 말에 극장전용건물이 들어섰다고 이창구 교수는 밝히고 있다. 명색이 극장이라고는 하나 의자는 없었고 일층과 이층에 가마니를 깔고 관람하였다고 한다.

1959년 5월에는 청주시 남문로2가 중앙공원내에 시공관을 착공하여 지붕이 없는 노천극장으로 11월 16일 준공을 보았다. 258평 부지에 35mm 영사기 2대를 갖추었다.

1962년 4월에 김삼증 시장 재직 시 지붕 복개공사와 상설극장으로서 보수하여 그해 12월 30일 준공을 보았다. 이외에도 청주에는 청주극장 옆에 현대극장이 있었고 수아사 위쪽으로는 중앙극장이, 상당공원에는 동아극장이, 청주대 인근에는 청도극장이, 피전거리 앞에는 자유극장이 문을 열었다.

극장문화가 한창이던 당시 청주극장, 중앙극장, 동아극장은 개봉관이었고 시민관 등은 재 개봉관이었다. 재 개봉관은 비록 낡은 필름이었지만 입장료가 쌌고 한 번에 두 편의 영화를 연속 상영하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이 많이 몰렸다. 오전에 입장료를 깎아주는 조조할인과 학생 단체관람은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동아극장은 외화만 취급하였다.

60년도 당시에 ‘초원의 빛’ ‘롱쉽’ 등 외화는 주로 동아극장에서 상영하였고 청주극장, 중앙극장은 외화와 한국영화를 함께 취급하였다. 동아극장 옆으로는 호떡집이 있었는데 남녀 학생들이 출출할 때면 이곳을 자주 들락거렸다. 중앙극장이 개장 4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미제 카본 영사기를 들여놓고 연속상영을 하던 중앙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반세기 역사를 접은 것이다. / 언론인·향토사학자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