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정월 대보름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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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정월 대보름 풍속
  • 임병무 고문
  • 승인 2006.02.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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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달이 되면 할머니는 시루떡을 정성껏 마련하여 마을 앞 개울로 나가 용왕굿을 하셨다. “ 용왕 님, 사해천왕 용왕 님, 슬하자손 상남자손 구만리 앞날 부디 굽어살피시고 입견만리 좌견천리 밝은 눈으로 돌봐 주세요…”

할머니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빨래터에 촛불을 밝혔다. 대낮도 아닌 저녁 어스름께 할머니가 고사 떡 시루를 머리에 이고 개울로 향하면 소지 종이 등을 챙겨들고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동산에 떠오른 보름달이 개울로 빠져들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제방에 납작 엎드려 고사지내는 것을 구경하다가 고사를 끝내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떡시루로 달려들어 고사떡을 훔쳐 먹었다. 고사떡이 시루 째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할머니는 “고사떡은 나누어 먹는 거란다”하시며 그냥 웃어 넘겼다.

조무래기들은 깡통에 구멍을 내어 쥐불놀이를 하였다. 그 통에 제방의 마른 풀은 모두 타 없어지면서 검은 색으로 변하였다. 쥐불놀이는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되었다. 한번은 이웃 집 초가에 쥐 불똥이 떨어지며 초가를 태운 적도 있다.

대보름의 하이라이트는 이웃 동네와의 석전(石戰)이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살아가던 윗마을 아랫마을이 갑자기 이날만큼은 적군이 되어 머리통이 깨지도록 싸웠다. 자갈을 잘게 부숴 호주머니에 가득 넣고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힘에 부쳐 후퇴할 요량이면 나이가 서너 살 위인 동네형이 계급을 강등시켰다. 스스로 원수(元帥) 자리에 오른 동네형은 아이들의 계급을 자기 마음대로 내렸다 올렸다 했다. 정월 대보름의 석전은 진급과 강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대보름 석전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일인들이 과격하다 하여 폐지시킨 바 있으나 그 맥락은 면면히 내려왔고 곳에 따라서는 석전 대신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다.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우리 조상들이 어째서 이런 과격한 놀이를 대보름날 허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석전을 통하여 진취적 기상과 용맹성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정월달 개천의 제방은 연날리는 장소였다. 방패연, 가오리연, 꼬리연이 창공에서 카드섹션을 벌였다. 아이들은 연줄에 아교나 유리가루 등을 발라 연줄 끊어먹기 내기를 하였다.

줄이 끊긴 연은 바람을 타고 제멋대로 하늘을 날다 산 너머로 종적을 감추기도 하고 전기 줄이나 대추나무에 내려앉아 바람 따라 디스코를 추어댔다. 창공을 가르는 연의 군무는 송액영복(送厄迎福)을 기원했기 때문에 멀리 날라가 없어져도 별로 서운해하지 않았다.

지신밟기는 또 하나의 신명나는 굿판이었다. 걸립패는 풍물을 치면서 집집을 돌았다. 마당을 밟고 부엌을 밟고, 장광도 밟아 주었다. 샘가에서는 상쇠가 덕담을 매겼다. “뚫으세, 뚫으세 샘물을 뚫으세”하고 소리를 매기면 풍물이 여러 장단으로 앞소리를 받았다. 할머니는 풍물패에게 고사반을 차려 대접하고 쌀도 한말 가량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쌀은 동네 애경사 때 요긴하게 쓰여졌다.

할아버지는 조선 소나무 가지를 지붕 위에 얹었는데 이는 노래기를 쫓기 위함이다. 할아버지는 살구나무, 호두나무, 대추나무를 시집 보낸다고 도끼로 가지 사이를 약간 찍고 그 틈에다 자갈돌을 끼웠다. 그래야 그 해에 과일이 잘 열린다는 말씀이시다.

개보름 저녁에 할머니는 접시에 들기름을 담아 목화솜 심지를 식구수대로 만들어 놓고 밤새도록 식구불을 밝혀두었다. 식구불이 잘 타야 그해 신수가 좋다고 했다. 이러한 대보름 풍경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 언론인·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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