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동들은 이내 주인의 추격에 뒷덜미를 잡혔다. 참외 서리에 나선 동네 악동들은 저마다 한 아름씩 노획물(?)을 안고 더딘 걸음으로 도망가다 그만 붙잡힌 것이다. 한 두개 씩만 따 먹었으면 무사했을 텐데 말이다. 잊혀지지 않는 어린 날의 초상(肖像)이다.

포커 게임은 버림의 게임이다. 새 카드를 또 받자면 아무리 좋은 패라도 한 장 버려야 한다. 달도 차면 기울 듯 잔도 차면 넘치기 마련이다. 욕심을 버릴 때 복(福)과 덕(德)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찾게 된다.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기쁨은 함께 할 수 없다” 춘추전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잠언이다. 유방을 도와 한(漢)나라를 창업한 책사 장량은 목적을 이룬 후 온갖 부귀영화를 떨치고 장가계(張家界)로 숨어든다. 토사구팽의 섭리를 일찍이 깨달은 것이다. 그곳이 오늘날 한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장가계이다.

장량은 창업 후 장가계 밖을 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가 한고조 유방의 곁에서 맴돌았다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모기 앞에서 칼을 빼지 않고 호랑이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는 한신은 1등 개국공신이나 창업 후 모진 형벌을 받고 죽었다.

범여는 원래 초(楚)나라 사람이나 월왕(越王) 구천(句踐) 밑에서 벼슬을 하였다. 월나라가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멸망하자 20년을 숨죽이며 국력을 길렀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서시(西施)를 오왕에게 시집보냈다. 오왕 부차는 절세미인 서시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고 궁궐을 화려하게 단장하였다.

범여는 문종과 함께 오나라를 멸하고 오왕 부차를 자진케 하였다. 20년 원수를 갚은 것이다. 월왕 구천은 상장군 범려에게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천하를 얻은 후 범여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그 또한 장량처럼 산 정상을 밟은 후 정상에 있지 않고 바로 하산을 한 것이다.

범여는 해안가로 이주하여 간척사업을 벌였다. 여불위는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하는데 길을 열어준 사람이다. 일설에는 여불위가 진시황의 친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불위는 하산의 철학을 모르고 정상에서 머물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민무구(閔無咎)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맏아들로 태종 이방원의 처남이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여기에 적극 가담하여 정사공신, 좌명공신에 책봉되었고 여강군(驪江君)에 봉해졌다. 그는 병권을 장악하면서 이방원을 옹립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였으나 부귀영화를 끝내 누리지 못하고 동생 민무질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조선조에는 기로소(耆老所)제도라는 게 있었다. 정이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70세 이상의 노 대신을 모시던 곳이다. 현직에서 물러나 실권은 없으나 왕이 수시로 기로연을 베풀며 노고를 위로하였다. 태조, 숙종, 영조 등도 60세가 넘어 기로소에 들어가 노 대신들과 함께 어울렸다.

현대사에서도 이같은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권좌에서 미련을 떨다가 불행해진 정치인도 여럿이다. 하산의 철학을 깨닫지 못함 때문이다. 이원종 지사가 표표히 정계를 은퇴하였다. 서울시장 한번에 충북지사 세 번, 그만하면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보고 정상에서 내려온 것이다.

‘부(富)를 긍정하는 자는 남에게 재물을 양보하지 못하며 명예를 긍정하는 자는 남에게 명성을 양보해 주지 못하며 권세를 좋아하는 자는 권세를 양보하지 못한다’는 노자(老子)의 말이 새롭다.
/ 언론인·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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