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국민당 대선 비자금의 핵심출처는 현대 중공업 … 고문이자 대주주인 정몽준 몰랐다?

정몽준 의원은 지난 9월 17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함과 동시에 대통령 후보로서 검증받아야 할 시험대에도 서야만 했다. 정 의원은 ‘정치개혁’과 ‘국민통합’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가 내건 명분들을 무색하게 하는 ‘과거사들’도 적지 않다. 이에 <주간 오마이뉴스>는 네 차례에 걸쳐 정 의원과 관련된 ‘의혹들’을 세세하게 짚어볼 계획이다. <편집자>

“막았어야 할 일 … 의사 결정엔 참여 안했다” 잘못은 인정, 연루는 부인
98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 ‘유죄’ 이익치 회장, 사건 직후 복귀도 의혹

1? 92년 현대중공업 비자금 509억원 국민당 유입사건
10월 1일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린 대선후보 초청 관훈클럽 토론회. 한 토론자가 정 의원에게 “92년 대선 때 부친이 현대그룹의 자금과 인력을 동원했던 것을 인정하느냐”고 묻자 그는 “여러 가지로 잘못됐고 바람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또한 “92년 대선 당시 현대중공업 자금 509억원이 국민당으로 흘러갔고 간부들이 처벌도 받았다. 자금인출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알았으면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못한 것은 나의 책임”이라며 ‘간접적 책임’을 인정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자신의 연루(혹은 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지난 93년 11월 1일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양삼승 부장판사)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업무상 횡령죄)과 선거법 위반(특수관계를 이용한 선거운동과 허위사실 공표)으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정 회장은 현대중공업 비자금 조성과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불기속 기소돼 징역 7년을 구형받은 상태였다. 법원의 판결 직후 박지원 당시 민주당 대변인은 “돈으로 정치를 오염시킨 결과에 대한 경종으로 본다”고 논평했다. 당시 재판부의 판결 요지는 이렇다.

93년 정주영 징역 3년 선고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씨가 현대와의 특수관계를 이용해 대선 직전 현대그룹 사장단회의 등에 참석해 자신에 대한 지원을 지시하는 등 불법선거운동을 벌이고 현대중공업에서 조성된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정치자금으로 불법사용한 사실이 대부분 인정된다.”
정주영 회장은 92년 국민당 창당과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하며 ‘재벌의 정치참여’를 본격화했다. 정 회장은 당시 사실상 현대그룹 40개 계열사 18만여 명의 직원을 동원하고 3조원의 개인재산을 기반으로 ‘돈과 조직’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 현대그룹은 400명의 인력을 국민당에 파견했다가 대선 이후 다시 회사로 복귀시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비자금 국민당 유입사건은 한 재벌의 ‘권력욕’이 부른 ‘범법행위’였다. 93년 2월 6일 검찰의 공소장 요지에 따르면 정 회장은 92년 1월 중순 자신의 비서실장이었던 이병규 국민당 대표 특보를 최수일 현대중공업 사장에게 보내 국민당 창당 및 총선자금 명목으로 매월 비자금 10억원을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92년 8월 초 광주공항 귀빈실에서 최 사장에게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해줄 것을 지시했다.
이병규 특보는 최 사장에게 매월 50억원씩을 국민당에 지원하도록 요청했고 92년 9월 초에는 대선까지 매월 100억원 이상의 자금지원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최 사장은 92년 1월 22일께부터 12월 1일까지 모두 667억4000만여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이 가운데 509억3000만여 원을 이 특보에게 건네줬다. 당시 현대중공업 측은 최 사장을 비롯해 장병수 전무, 이상규 재정부장 등이 함께 선박 원자재 수입대금으로 지출되는 것처럼 위장해 회사자금을 빼내는 방법으로 국민당에 정치비자금을 제공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당시 이병규 국민당 대표특보에게 내 주식을 팔아 정치자금으로 쓰라는 지시를 내린 적은 있으나 비자금 조성 부분은 지시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한다”며 비자금 조성을 지시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또한 검찰조사에서 “최 사장 등이 주식매각 대신 비자금 조성으로 자금을 마련했다면 이는 과잉충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몽준 ‘몰랐다’ 설득력 없어

그렇다면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이자 고문이었던 정몽준 의원은 현대중공업의 비자금 조성과 국민당 유입을 전혀 몰랐을까. 정 의원은 92년 1월 민자당을 탈당하고 2월 국민당에 입당해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5월에는 정책위 부의장을 맡았다. 그리고 92년 대선기간에는 부산·경남 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89년 현대중공업 노동자 연쇄 테러사건 이후 회장직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2선 후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대중공업의 실질적인 오너였다.
즉 현대중공업의 오너였고 부친의 선거운동을 주도적으로 지휘하고 있던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엄청난 정치비자금이 유입됐다는 사실에 대해 당시 “아무 것도 몰랐다”고 해명했지만 설득력은 별로 없어 보인다. 물론 사건의 정점에는 부친인 정 회장이 있겠지만 국민당에서의 위치 및 현대중공업과의 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그 역시 비자금 조성과정과 전달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국민당으로 유입된 비자금의 핵심출처는 현대중공업의 돈이었다. 92년 8월 현대중공업 재정부 현금출납 직원인 정윤옥씨는 200억원의 회사자금이 국민당으로 전달됐다고 폭로했다. 정씨가 당시 경찰에 진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중공업 기업자금의 국민당 유입은 현대중공업 최수일 사장과 장병수 전무의 지시에 따라 재정부장 이상규씨가 실무 지휘했다. 또 이 재정부장은 출납과장 임양희씨와 직원인 나와 김경숙씨 등을 시켜 기업자금을 ‘돈세탁’했고 이를 국민당 관계자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나는 국민당에 파견돼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는 정희찬 대리와 울산에서 파견을 나와 역시 국민당에 근무하는 김해종 부장에게 수표와 현금을 건네줬고 이들은 다시 정주영 후보 비서실장 이병규씨에게 이 비자금을 전달했다.”
게다가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임양희 현대중공업 재정부 출납과장이 작성하고 장병수 전무가 서명한 ‘지출메모지’가 발견됐는데 여기에는 정주영 당시 국민당 대표에게 100억원,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에게 327만원, 울산 2억원, 기타 19억1천여만원이 지출된 것으로 적혀 있었다.
또한 최수일 현대중공업 사장과 장병수 전무는 검찰(서울지검 특수1부)에서 92년 7월부터 회사의 선박 수출대금 565억원을 빼돌려 이 가운데 400여억원을 국민당 쪽에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특히 당시 구속수감됐던 최 사장은 “선거 전 이병규 국민당 특보가 정 대표의 부탁이라며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해 왔으나 주식매각에 어려움이 있어 우선 비자금을 마련해 국민당 쪽에 전달하고 나중에 상환받을 생각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대선 이후 정 회장도 현대중공업 자금을 갚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처분해 506억원의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난 9월 22일 현대중공업 노조는 “정 의원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대중공업 지분을 처분해 현대중공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 의원은 소액주주의 보호 등을 명분으로 현대중공업 지분 매각 요구를 거부했다. 그런 그가 509억원이라는 막대한 회사자금이 특정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쓰였던 것은 왜 방관했을까.

2? 98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연루의혹
98년 8월 증권거래소는 금융감독원에 현대전자 주가조작 징후를 통보한다. 금융감독원은 99년 2월 조사에 착수하고 4월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다. 검찰(서울지검 특수1부)은 수사에 착수한 지 5개월만에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과 박철재 상무를 구속하고 수사를 마무리한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일명 ‘이익치 사건’)은 98년 4월부터 11월까지 현대중공업·현대상선·현대전자 등 현대그룹 3개 계열사의 자금 2200억원을 동원해 현대전자 주자를 주당 1만4800원에서 3만2000원으로 끌어올려 현대그룹에 수천억원대의 시세차익을 안겨준 사건이다. 사상 최대 규모(2200억원)에다 사상 최장기간(8개월) 이루어진 주가조작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세인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물론 당시 일각에서는 ‘정씨 일가에 대한 정권의 견제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정몽준 의원을 겨냥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월간중앙> 99년 10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분석이 나와 있다.

정씨 일가 2000억 시세 차익

“두 가지 이설(異說)이 따라 다닌다. 하나는 마땅한 차기 대권주자 후보를 찾지 못한 여권이 차기 대권후보 자리를 보장하며 정 의원을 영입하려 했으나 정 의원이 이를 거절, 오히려 그를 견제하기 위해 여권이 현대그룹을 건드렸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아예 정 의원이 차기 대권후보로 나서지 못하도록 미리부터 ‘못질’을 해 상처를 입히려 한 것이란 추측이다.”
‘정치적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현대전자 주자조작 사건은 지금 정 의원에게 ‘검증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증권거래소가 처음 금융감독원에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징후를 통보할 때도 ‘현대중공업이 조직적으로 현대전자 주가를 조작(시세조정)한 혐의가 짙다’며 현대중공업이 이 사건의 핵심임을 내비쳤다. 정 의원은 당시 현대중공업의 고문이자 최대주주였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총 1882억원을 동원해 현대전자 주식 총 805만7420주를 순매입했다. 98년 6월에 120만주, 7월에 320만주, 8월에 120만주, 9월 3일부터 11월 13일 사이에 100만주씩 순매입한 것이다.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에 동원된 현대계열사 자금(2200억원)의 85.5%에 해당하는 1882억원을 현대중공업에서 동원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사건과 현대중공업의 연관성은 높을 수밖에 없다.
현대중공업이 매수강도를 높이자 98년 5월 1만4000원대였던 현대전자 주가가 한달 후에는 3만대로 2배 이상 올랐다. 당시 금융감독원 발표 내용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은 총 1952회의 시세조종주문을 내 현대전자 주자를 최저 1만4800원에서 최고 3만2000원까지 끌어올리는 주도세력이었다. 당연히 일반인들의 추격매수가 이어졌다. 이렇게 현대전자 주가가 폭등한 상태에서 현대의 정씨 일가(정주영·정몽준·정몽헌·정몽규·정몽근)는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팔아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이 폭로되기 전까지 정씨 일가 등이 매각한 주식은 총 3805만6984만주에 달했다.
하지만 현대전자 주식 구입 시기와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시세차익을 계산할 수는 없다. 당시 참여연대에서는 “작년(98년)에 현대전자 주가가 가장 낮았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대략 2천억원에 이르는 시세차익을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밝혔다. 참여연대는 또한 “만약 정씨 일가가 주가조작 사실을 미리 알고 주식을 매각했다면 이는 내부자 거래에 해당한다”면서 “재벌이 계열사를 동원하여 주가를 조작한 것은 대다수 소액투자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현대그룹 측은 “주가조작을 했다면 값이 오른 주식을 팔아서 이익을 챙겼어야 하는데 여전히 해당 계열사들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며 “주가조작이 아니라 계열사가 자금운영 차원에서 주식투자를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부사장 단독으로 1800억 동원?

정몽준 의원은 98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현대전자 주식 8만주를 팔아 상당한 시세차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 의원은 최근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뿐만 아니라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었다는 항간의 의혹에 대해서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는 지난 9월 25일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당시 금감원에서 그런 발표를 해 뉴스가 됐지만 금감원 담당자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조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금감원 책임자를 만나 ‘누가 조작을 해서 주가를 올리면 (주식을) 산 사람에게 문제가 있지 판 사람에게 문제가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85년 5000원을 주고 산 주식을 15년 후에 1만5000원을 주고 팔았다.”
조작 의혹을 ‘조작설’로 맞선 것이다. 정 의원은 또한 지난 1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도 “정부당국자 중 일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뉴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85년 5000원을 주고 산 주식을 15년 후에 1만5000원을 주고 팔았다”는 정 의원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시사저널> 최신보도에 따르면 그는 98년 10월 15일 현대전자 주식 2만주를 2만8024원에 판 것을 비롯해 주당 평균 2만5983원에 주식을 처분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99년 2월 공직자 재산등록신고에서 현대전자 주식 6만5714주(16억9391만원)를 매각했다고 신고했다.
당시 이영기 현대중공업 부사장은 현대중공업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현대전자 주식을 매입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판단 아래 이루어진 일이라며 ‘단독범행’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전문경영인인 이영기 부사장 단독으로 1800여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느냐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즉 현대중공업의 고문이자 최대주주인 정 의원과 ‘왕회장’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묵인(사전승인) 없이 ‘일’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게다가 이익치 회장과 이영기 부사장 등 주가조작 사건 핵심관련자들이 사건 직후 바로 계열사로 복귀한 점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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