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에게 검찰은 두려운 존재다. 검찰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인정받는 것은 수사권과 공소권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이 없는 세상인데, 검찰이 맘만 먹으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래서 겁나는 것이다.
충청리뷰가 검찰에 대해 일종의 비판기사를 게재하자 당장 검찰쪽의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급기야 리뷰 주주들에 대한 뒷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이미 누구누구를 소환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 나온다. 보도가 나간지 불과 며칠만에 대표적인 2개 주주회사에 대한 추적이 동시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리뷰는 이를 표적 내지 보복수사로 단정한다. 명백히 말해 언론 탄압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검찰에 우선 하고 싶은 말은 왜 그렇게 성급하냐는 것이다. 설령 일개 주간지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뒀어야 정상이다.
나는 오늘 가장 냉정한 시각에서 이 문제를 짚어 보려 한다. 언론이 검찰이라는 권력 기관 좀 긁었다고 해서 당장 그 언론사의 주주를 위협한다? 기가 막힌 발상이다. 과거 군부독재시절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일단 명분을 갖고 덤벼 들었던 것이다. 그 명분이란 것이 비록 잘 포장된 허구일지언정 과정은 중시됐다. 이런 유사한 일을 이미 몇차례 경험한 리뷰지만 청주지검의 처사는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납득이 안 간다. 가히 충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지역이 얼마나 얕보였으면 이럴까 하는 굴욕감마저 든다. 차라리 지나치게 권위화된 지방검찰의 ‘오버’였으면 좋겠다.
검찰측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언론의 입장에선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을 침해받았다. 때문에 이번과 같이 보도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공격에 대해선 사운을 걸고 투쟁할 수 밖에 없다. 충청리뷰는 주주들의 곤혹스러움을 굳이 외면한 채 검찰에 당당히 맞서기로 했다. 이는 언론자유를 탄압하는 작금의 사태에 침묵한다면 독립언론으로서의 존재가치를 근본적으로 상실한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앞으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저항할 것이고 그 과정은 리뷰 지면을 통해 낱낱이 공개하겠다. 물론 칼자루를 쥔 검찰보다 붓자루 밖에 없는 리뷰쪽의 상처가 클 것이다. 때문에 리뷰는 앞으로 자진(自盡)하는 심정으로 대응하겠다.
권력기관이 언론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직의 속성상 견제와 비판을 체질적으로 거부한다. 때문에 권력과 언론은 항상 일정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고 국민들은 어느 한쪽의 일탈을 막기 위해 이를 원한다. 국민의정부에 들어서 언론의 취재영역은 크게 늘어 났지만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기술적인 통제는 오히려 정도가 심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툭하면 제기되는 소송이다. 특정 기사를 문제삼아 해당 언론사와 기자를 상대로 명예훼손 고발을 남발하는가 하면 어느땐 아예 거액의 민사소송을 제기해 언론사의 진을 빼기도 한다. 이렇게 한번 당한 당사자들은 당연히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고 결국 자기 스스로 기사를 검열하는 소심증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비판기사와 관련해 검찰이 직접 검찰력을 행사하는 사례는 드물다.
권력기관과 언론간의 관계를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71년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펜타곤 페이퍼, 소위 국방성 비밀문서 사건이다. 당시 뉴욕타임스 등이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과정을 정리해 놓은 국방성의 비밀문서를 입수, 기사화하자 법무성이 국가 기밀 유출을 이유로 뉴욕 연방지방법원에 기사게재중지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기각당한다. 판결의 이유는 이렇다.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라는 커다란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항상 시비조로 고집스럽게 어디든 코를 들이 밀려는 속성을 가진 보도기관의 존재를 참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소송건은 계속된 논란 끝에 결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신문만이 정부의 기만을 폭로할 수 있다”는 판결을 이끌어냄으로써 종결됐다.
이를 곱씹으면서 나는 지금 리뷰가 처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큰 좌절감마저 갖는다. 엄연한 사실보도로 검찰을 한번 비판했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언론보고 어쩌란 말이냐. 청주지검에 묻겠다. 주주를 위협할 게 아니라 차라리 리뷰에 직접 칼을 대라. 그게 최고 권력기관다운 당당함이 아닌가. 권력과 공권력은 다중의 인정과 신뢰가 전제될 때 비로소 그 행사의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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