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은 18세기 예단(藝壇)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진다. 시, 서, 화 3절(三絶)로 일세를 풍미했던 예술가다. 여기에다 화평(畵評:미술평론)까지 하였으니 범인으로서는 넘지 못할 큰 산이었다. 당대에 이름을 떨친 김홍도, 신위 등도 그의 제자다.

그는 사대부 화가로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켰다. 개화의 물결이 일렁일 즈음 과감히 서양화의 기법도 수용하였으니 실험정신 또한 높이 사 줄만 하다. 벼슬길에는 비교적 늦게 올랐다. 64세때 기구과, 66세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영릉참봉, 사포별제,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때 사신으로 북경을 나녀왔으며 76세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산수를 남겼으니 노익장에 틀림없다. 예술에는 일찍 눈을 떴고 벼슬에는 늦깎이였으니 유유자적하고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한 선생의 선비정신을 익히 짐작 할만하다. 그런데 표암 선생의 서화가 돌연 청주에서 발견되었다.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은 작년 6~8월 ‘과거, 출세와 양명전’을 마련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표암의 서화 3점이 발견된 것이다. 서화 3점은 표암의 막역지우인 오저(吳著)의 사직상소문 뒷면에 쓴 한시 2점과 묵죽화 1점이다.

가로 102cm, 세로 85cm 크기의 저지(楮紙)에 쓴 오언시, 가로 103cm, 세로 86cm 크기의 칠언시, 가로 101cm, 세로 87cm 크기의 묵죽화는 선생의 낙관과 함께 즐겨 사용하던 ‘표옹(豹翁)’이라는 자필이 선명하다.

이 서화는 청주시 수곡동에 사는 오저의 후손 오병정 씨가 출품한 것인데 출품목록을 점검하던 과정에서 백제유물전시관 강민식 학예연구사가 상소문 뒷면에 그려진 서화를 확인한 것. 오병정 씨는 이 전시회에 간찰, 상소문, 교지, 의송(議送), 호패 등 가장 많은 자료를 출품했다.

진주 강씨 설봉공파(雪峯公派)에서 발간한 설봉회보(雪峯會報)는 표암 선생의 서화 발견을 머리기사로 다루었는데 설봉회보의 편집인을 맡고 있는 강우진 씨(극작가)는 “표암 선생이 사헌부 장령이었던 오저의 사직을 막고자 일부러 상소문 뒷면에 서화를 그린 것 같다”고 추정했다.

오갑균 청주교대 명예교수가 국역한 오언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릴 없이 조용히 앉아 있으니/ 하루가 이틀과 같으오/ 이 같이 칠십년을 살았으니 백사십년을 산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칠언시(서원역로가 성두에 걸렸고/ 불게 물든 청산과 물은 급류라네/ 어디에 있건 서로 사모하면서 만나지 못하니/ 깊은 밤에 동반자 없이 빈 누각에 의지할 따름이네)묵죽화-화제(을사년 가을 표암이 그리다/ 오사회(오저의 字)의 좋고 어진 것을 나타낸 것이요/ 어디든 경치 좋은 누각은 무한한 것이요)

표암과 추봉(楸峰:오저의 호)의 우정이 서화의 행간에서 새록새록 배어나온다. 표암의 서화는 지난 2003년 이후 세 번째의 발견으로 청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표암의 서화가 청주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진주 강씨와 보성 오씨간의 혼맥에서 그 자취가 찾아진다. 조선 중기 청백리로 도승지를 지낸 설봉 강백년(姜栢年)의 할머니가 청주에 살던 보성 오씨 집안으로 출가를 한 것이다. 지금도 청원군 낭성면 갈뫼 기암서원에는 강백년과 오숙 선생을 제향하는 사당이 있다. 이처럼 두 문중 간에는 대를 이어가며 교분을 쌓았고 더러는 혼사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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