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은 태초부터 관광 특구이자 거주 특구다. 한반도 인류의 첫 족적이 단양에 찍혔기 때문이다. 산 좋고 물 맑아 사람 살기에 제격이었다.

도담삼봉을 건너서 아래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야산지대에 거대한 동굴이 입을 열고 있다. 이곳이 70만 년 전, 인류가 살았던 ‘단양 금굴’이다.

지난 1983년~1986년에 연세대 손보기 교수가 발굴 조사한 이 유적에서는 주먹도끼, 찌르개 등 전기구석기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 동굴은 전기 구석기에서부터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 켜켜이 묻혀 있는 표준 유적(Standard site)이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로 보아 한반도에서 단양 금굴보다 더 오래된 유적은 없다. 그래서 금굴은 한반도의 자궁이자 배달의 고향이다. 이곳은 답사하고 첫 답사기록을 남긴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외국인이다. 1894년 영국인 선교사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도담삼봉을 건너며 ‘물빛이 에메랄드 빛 같다’고 기술했다.

당시의 물빛은 오늘날보다 훨씬 푸르고 진했을 것이다. 비숍여사는 금굴에 도착하여 88피트(26m)까지 들어갔다. 이 탐사기록은 ‘한국과 그 이웃들’이라는 제목으로 1898년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에 출간되었다.

적성면 애곡리 남한강변에 있는 수양개 유적은 한국의 대표적 후기 구석기(1만7천년)유적이다. 충북대 박물관은 지난 1983년부터 1996년까지 7차례에 걸쳐 이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다. 애당초 충주댐 수몰지역 유적조사에서 누락된 것을 충북대 이융조 교수가 찾아낸 것이다.

이곳은 한데(야외)유적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49개소에 이르는 석기 제작소와 더불어 슴베찌르개, 좀돌날 몸돌, 격지 등 2만여 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슴베찌르개는 사냥도구의 일종이다. 삼각형 모양의 슴베찌르개는 전남 화순, 대전을 거쳐 일본 큐슈지방으로 건너갔다.

단양에는 이외에도 상시바위그늘, 구낭굴 등 구석기 유적이 산재한다. 그러기에 고고학계에서는 단양을 일컬어 구석기 유적의 보고(寶庫)라고 부른다. 단양이 살기 좋은 고장임을 구석기인들이 먼저 알았던 것이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며 단양은 ‘전쟁특구’로 돌변했다. 신라의 북진정책과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단양에서 충돌한 것이다. 죽령 높은 재를 사이에 두고 신라와 고구려는 필사의 전투를 감행하였다. 오죽하면 고구려 온달장군이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고토를 찾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출사표를 던졌을까. 온달장군은 결국 아단성(阿旦城)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단양의 옛 지명은 을아단(乙阿旦)이다.

조선조의 문신 신광수는 단양을 돌아보며 단산별곡(丹山別曲)을 썼다. 수몰직전, 신광수의 후손 집에서 발견된 단산별곡은 정철의 관동별곡과 쌍벽을 이룰만한 가사문학의 진수로 관련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단원 김홍도는 연풍현감을 지내며 단양팔경을 그렸다. 아마도 임금이 단양팔경을 그리라고 그를 단양 가까운 연풍현감에 임명한 듯 하다. 단양팔경의 아랫도리는 충주댐에 묻혔어도 그 절경은 그대로 남아 있다.

농사거리도 시원찮고 한때 단양 경기를 부양하던 광업도 시들해졌다. 단양이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관광밖에 없다. 단양 관광특구가 드디어 이루어졌다. 돌도끼를 들고 동굴에서 나오던 선사인도 반가워 할 일이다.
/ 언론인·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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