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6일 실종된 지 11년 6개월만에 ‘가여운 넋’으로 돌아온 다섯 ‘개구리 소년’의 사인(死因)을 두고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자연사인지 타살인지, 동사(凍死)인지 사고인지, 혹은 총기 살해인지를 놓고 논란도 커졌다. 여기에 확실치도 않은 제보와 주장들이 꼬리를 물면서 사건은 점점 그 실마리가 얽혀 가는 추세다. 비록 지금은 싸늘한 유골로 발견된 개구리 소년들이 ‘과연 어떻게 죽었나’하는 문제가 가장 큰 이슈지만, 지난 11년간 ‘개구리 소년’들에 대한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그들이 어디에 있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실종 뒤, 연인원 32만 명의 군경이 동원돼서도 소년들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하자 전국 여기저기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추측들이 쏟아져 나왔다. 혹자는 부모들에 의해 암매장됐다고도 주장했고, 혹자는 어느 기차역에서 ‘앵벌이’를 하고 있다고 떠들었다. 어떤 이는 전남의 어느 염전에서 그들을 보았다고도 했고, 다른 이는 한 ‘나환자촌’에서 그들이 희생됐다고 제보했다. 결국 이러한 근거 없는 추측들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났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 크게 상처받은 이들은 바로 11년이 넘도록 전국을 헤맨, 속이 시커멓게 타버린 부모들이었다.
그러나 ‘앵벌이’든, ‘암매장’이든, 아니면 ‘인신매매’든, 근거 없이 떠돌던 그 소문들은 비교적 ‘순수’했다. 최소한 이들 소문과 제보는 소년들의 ‘실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는 않았다. 반면 지난 92년, 한 주간지는 ‘개구리 소년’들이 “납북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기고문을 실음으로써 이들의 ‘실종 사건’을 ‘안보 상업주의’에 철저히 이용했다.
지난 92년 5월 17일 발행된 <주간조선> 제1202호에는 이른바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내고 ‘북한문제전문가’로 알려진 이기봉씨의 글이 한편 실려 있다. ‘특별기고’ 형식으로 실린 이 글의 주제는 바로 “개구리 소년들이 북한에 끌려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씨는 주간지 4쪽(p30∼33)에 달하는 이 장문의 기고글에서 어떠한 증거나 정황도 제시하지 않고 다만 ‘추측과 비약’에 의해 소년들이 북에 끌려갔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씨가 이 글에서 ‘개구리 소년 납북설’을 주장하게 된 근거와 글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이씨는 국내에서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소년들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북쪽‘으로 눈길을 돌린 뒤 54년부터 80년까지 납북된 사람이 모두 3662명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또 신상옥씨 등의 증언을 빌어 납북된 이들이 김일성 주석의 ‘선전’에 이용된다는 것과 납북·월북한 사람들 중 ‘어린이’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 이 때문에 북한이 “생지옥과 같은 남한의 실상을 어린이들의 입으로 직접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하고”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 ‘어린이 납북’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개구리 소년 납북 시나리오…
“북한 현지 공작원 치밀한 계획”

이러한 이씨의 주장은 어떠한 증거도 없이 다만 논리적인 비약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더 가관인 것은 이씨가 이 글에서 가정한 ‘개구리 소년 납북 시나리오’다. 이씨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지어낸’ 납북 시나리오는 아래와 같다.
“… 상부선의 지령을 받고 이미 상당한 기간 어린이들의 동정을 관찰해온 현지 공작원은 공휴일을 맞아 어린이들에게 개구리를 많이 잡아주겠다는 등의 말로 일단 와룡산의 선원 연못까지 유인한 다음 바다와 섬 구경을 시켜주겠다면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둔 자신의 중형 승용차에 소년들을 태운다. 호기심과 탐험심이 많은 어린이들은 좋아라 한다. 승용차는 1시간여 만에 경북 영일만이나 구룡포, 아니면 영일군 지행면 양포 등지의 해안지대에 도달한다. 현지 공작원은 대기중인 안내 호송조직과 접선이 이루어지고 섬 구경 미끼에 걸린 어린이들은 대기중인 소형 어선(공작선)에 오른다.
그날 포구는 지방의원 선거로 한산하면서도 약간 어수선했을 것이다. 어린이들을 태운 소형 공작선의 목적지는 공해상의 모선이었다. 그러나 그 시각 출항이 여의치 않으면 공작원들은 어린이들을 해안의 후미진 곳으로 유인, 수면제를 먹여서라도 잠에 떨어지게 하고 밤을 기다렸다가 어린이들을 고무보트에 싣고 공해로 향하고 현지 공작원은 이들과 작별, 다시 임지로 돌아온다…”(p33)
정확히 목격했을지라도 제대로 기술하지 못했을 이와 같은 상황을, 이씨는 탁월한 ‘상상력’ 하나로 ‘현장 묘사’ 해 나갔다. 이씨는 또 글의 마지막에 “83년 9월 22일 대구 삼덕동 미국문화원 폭발사건도 북한의 범행이었다”는 친절한 해설도 잊지 않았다.
83년 대구에서 일어난 ‘미문화원 폭발 사건’과 91년 ‘개구리 소년’의 납북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일단 접어둘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씨의 황당한 ‘납북설’이 국민들과 ‘개구리 소년’의 부모들에게 그대로 먹혀들어 갔다는 점이다.
지난 10월 4일 <조선일보>의 ‘조선데스크’에 실린 허도선(44, 당시 9살 된 김종식군 어머니)씨의 인터뷰는 이와 같은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이가 북(北)에서 살아있을 걸로 믿었지요.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어요. 차라리 이런 현장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런 기대를 갖고 살 수 있었을 테지요.”
채 피지도 못하고 ‘넋’이 되어 돌아온 다섯 소년들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그야말로 근거 없는 ‘소설’을 써댄 이씨와 <주간조선>은 이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오래된 비트의 흔적’을 근거로 이들이 ‘간첩’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보도가 다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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