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는 국가정보원장이 둘 있다.’ 한나라당에서 정형근 의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가 정권의 움직임에 대한 고급 정보를 갖고 각종 공세를 기획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정권과 현대의 대북 비밀지원 의혹과 관련해 100여쪽에 달하는 정보기관 기밀자료가 있다고 한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등 권력실세들의 통화내용이 담긴 ‘도청자료’ 묶음도 있다고 한다.”
이른바 ‘4000억원 대북 비밀송금설’이 한창 달아 올랐을 때 <중앙일보>(9월 30일자) ‘정국 고비마다 의혹 폭로…정형근 탐구’ 기사의 한 대목이다.
이 신문의 보도처럼 정형근 의원이 정국 고비마다 의혹을 폭로해 물줄기를 돌려놓은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폭로한 의혹의 십중팔구는 8할의 팩트(사실)와 2할의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2할의 거짓이 가미된 의혹의 실체는 대부분 거짓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김정일은 빨갱이다(A). 김대중은 김정일과 친하다(B). 따라서 김대중은 빨갱이다(C).”. 여기서 A와 B는 각각 팩트(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C 명제가 참일 수는 없다. 이런 오류는 논리학의 기본이다. 그런데도 정형근 의원의 주장은 종종 ‘참’인 것처럼 간주된다. ‘정보’가 전공인 그의 독특한 경력 때문이다.
그는 김영삼 정부에서 안기부 차장(국내 담당)을 지낸 인물이다. 80년대 초에 검찰에서 안기부에 파견 나가 수사지도관, 대공수사단장, 대공수사국장, 수사차장보, 기획판단국장, 차장까지 지냈으니 나름대로 안기부에는 정통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국정원 관련 발언에서 팩트를 거의 찾을 수가 없다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두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의도적으로 틀린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첩보를 바탕으로 과장된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대개 반반이다.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9월24일 국정감사에서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대한생명을 인수하기 위해 정권 실세에게 로비하도록 전화 지시를 했다”고 주장한 데 이어 25일 해당 자료의 출처에 대해 “국가정보원이 도청한 것을 입수했다”고 밝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정 의원은 이날 도청자료의 입수경로에 대해 전달자의 신분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조작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실 여부는 국정원이 더 잘 알 것”이라며 “자료는 국정원의 한 고위간부가 제3자를 통해 건네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정원은 여러 요원의 집을 조사했으며, 지금은 밖으로 나가는 요원들 신발의 밑창까지 뒤지고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일면 맞는 측면이 있다. 국정원 감찰실은 이 때문에 보안검열을 강화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그런 식의 보안감찰은 정형근 의원과는 무관한 일상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또 새 정부 들어 내부의 정형근 의원 ‘라인’은 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선’을 대고 있던 직원들도 자체 감찰 활동의 강화로 정 의원한테 내부 문건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국정원 ‘전직’이 ‘현직’을 만나는 과정에 누설된 내부 첩보가 정형근 의원과 한나라당에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대중 정부 출범후 퇴직자들의 모임인 이른바 ‘국사모’라는 단체가 자주 거론된다. 초기 회원 21명 가운데 17명이 정형근 의원과 동향인 데다가 일부 회원은 정 의원과 가까운 인사이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은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한 것을 계기로 “우리는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部訓) 또한 “정보는 국력이다”는 원훈(院訓)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정형근 의원의 정보활동은 여전히 ‘음지’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모 신문사 사주가 한때 ‘밤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로 불렸듯이 지금 그는 ‘밤의 국정원장’이라는 별로 명예롭지 않은 칭호를 얻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 수술 프로젝트’에서 보듯 그는 이 칭호를 좋아하는 듯하다.
최근 국정원에서는 이회창 후보의 집권을 전제로 ‘정형근 차기 국정원장’ 구도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물론 이 설(說)의 진원지도 정형근 의원이다. 현재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정형근·L씨 등 전직 국정원 국내·해외담당 차장이 전문성과 최근의 정국 및 국정원 상황을 토대로 비밀리에 국정원 개혁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작은 정부’인 국정원의 ‘그림자 정부’(새도우 캐비넷)이다.
이 개혁안에는 현재의 조직을 1(해외담당)·3차장(북한담당)을 묶어 조직에서 따로 분리하고 2차장(국내담당) 산하조직을 별도의 기관으로 분리하는 복안이 담겨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특정지역 출신을 자연스레 배제하고 조직을 공중분해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국정원 개혁 명분을 살린다는 취지 하에 국내담당 조직을 따로 분리해 ‘제2 국사모’ 출현도 막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국정원 수술 프로젝트’가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을 교란시키기 위한 고도의 술수라는 지적도 있다. ◑

한 국정원 퇴직자가 밝힌 정형근 의원의 ‘사고대책반’

이른바 문민정부 초기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 드라이브’를 걸 때 대학교수 출신의 김덕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안기부의 정치정보 수집을 제한했다. 그는 정치동향 정보수집 제한 지시와 함께 수집요원들에게 원칙대로 ‘비노출 간접활동’을 강조했다. 일선 I.O(Intelligence Officer)들이 이 지시와 원칙을 어겼을 경우에는 조직에서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가이드라인까지 밝혔다. 그러나 정보수집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안기부 간부들은 ‘책상물림’인 김덕 부장과는 생각이 달랐다.
94년 6월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당시 정형근 안기부 1차장(국내담당)은 차장실 직속으로 ‘사고대책반’이라는 특별대책팀을 만들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대형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대통령은 군사독재 시절의 부실공사가 지금에야 드러난 것이라고 했지만, 재임중에 큰 사고가 일어난 것은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사고예방팀’은 그런 정보를 수집한다고 했다. 멍청하거나 혹은 순진한 직원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정보기관에는 정식 이름인 고유명칭과 위장된 통상명칭의 두 가지가 있다. 안기부 조직을 예로 들면, 기획판단실이 고유명칭이고 101실이 통상명칭이다. 감이 빠른 직원들은 ‘사고예방팀’이라는 위장명칭의 팀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지방선거에 대비한 기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사고예방팀의 운명은 한 직원이 본부의 수집명령을 누설함으로서 이상한 운명을 맞게 되었다. 정형근 1차장은 일부 지부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수집하고, 그 연기대책을 만들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특별지시가 언론에 유출된 것이다. 감찰실에서 조사를 했지만 유출자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책임을 물어 정형근 차장을 해임시키고, 이미 통일원장관으로 영전해 간 김 덕 전(前)부장도 해임시켰다. 김덕 부장으로서는 재임중 정치 개입을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이를 어긴 부하들 때문에 나중에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무슨 조직이든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없애지 못한다. 처음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대책을 위해 사고예방팀을 만들었으나, 이름 그대로 사고예방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사관 1명, 부이사관 3명 등 28명이나 되는 팀은 정형근이 해임 당하자 ‘일’이 없어졌다. 그러나 자리 보전을 위해 ‘밥값’은 해야 했다.
그래서 전국의 대형교량, 건물, 공사장에 나가 ‘공사 진척이 어떠냐, 안전도 진단을 했느냐’ 하면서 문제점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밤새워 보고서를 만들어 정보비서관에게 보냈다. 그러나 ‘수고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슬그머니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었다. 사고예방팀 탄생의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그 후에도 쓰레기통에 들어갈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출장도 다니고 낯선 공사장을 기웃거렸다.
결국 정치적인 배경이 없던 정형근이 안기부를 발판 삼아 출세하기 위해 만든 도구가, 그가 가고 없어도 나라의 녹을 축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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