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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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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국정원장’ 정형근의 4대 비리

<주간 오마이뉴스> 취재팀은 국정원의 ‘정형근 비리파일’을 단독 입수했다. 국정원 감찰실이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의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 재직중 비리를 수집해 정리한 이 파일은 지난 98년 2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지난 대선에서 이른바 ‘북풍공작’ 및 정치공작 가담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파일을 입수하는 데 도움을 준 전직 국정원 간부도 “이종찬 원장 재임중 정형근 사조직 인맥을 추려내고 범(汎) 정형근계 감찰활동을 강화한 것은 사실이다”고 밝혔다

지난 9월24~25일 정형근 의원은 국회 정무위의 국정감사에서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와 관련해 국정원 도청자료를 공개하며 이 자료의 출처를 “국정원 고위 간부가 울분과 정의감에서 전해준 것이다”고 밝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형근 비리파일의 구체적 입수경로를 밝힐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또한 ‘국정원 고위 간부가 울분과 정의감에서 전해준 것’이라는 점이다.
정형근 의원의 안기부 재직기간은 만 12년. 통상 길어야 2~3년씩 파견 나갔다가 친정에 복귀하는 검찰 인사관행에 비추어 이례적인 행로다. 그는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 초기인 83년 초에 안기부 대공수사국 법률담당관으로 파견되어 수사지도관, 대공수사단장, 대공수사국장, 수사차장보, 1국장(기획판단국장)을 거쳐 94년 12월에 안기부 2인자인 1차장(국내담당)이 되었다. 95년 2월 불거진 이른바 ‘지방선거 연기 검토 문건’ 파동으로 옷을 벗지 않았다면 검사로 안기부에 파견 나가 부장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정원의 ‘정형근 비리파일’에 따르면 그의 안기부 12년 재직중의 ‘승승장구’ 이면에는 오욕과 비리가 점철되어 있다. 이 ‘비리파일’은 정 의원의 안기부 재직중 비리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이하 ‘비리파일’의 원문은 고딕체로 처리했음).

1? 정치공작 사례
홍사덕 의원 ‘흑색유인물’ 살포 지시
○ 92년 3월 14대 총선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재임중 강남을 선거구에서 여당인 민자당 김만제 후보와 민주당 홍사덕 후보가 경합하게 되자, 홍사덕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 상부의 지시도 없이 당시 수사과장에게 홍사덕 후보의 여성편력 비방 유인물을 제작해 살포토록 지시하여
- 당시 수사계장 한기용 등 4명이 홍 후보의 축첩 관련 비방유인물을 제작해 3월21일 야간에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단지에 살포하던 중 홍 후보 선거운동원에게 발각되어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혐의(후보자 비방)로 구속되자
- 부하직원 한기용이 민자당원인 친구의 부탁으로 행한 개인적인 사건으로 축소조작후 직속상관인 소속 과장과 단장을 견책 등 징계처리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 사건 직후 소속 직원들로부터 갹출한 격려금을 자신의 명의로 관련자 한기용 등 4명의 순화 및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활용했는 바
- 그 결과 유인물 살포를 지시받은 한기용 등 부하직원 4명은 사법처리(각각 징역 1년6월~8월, 집행유예 1년6월~3년)되어 직장을 떠났음에도
- 정형근 자신은 동 사건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은폐조작후 충성심을 인정받아 수사차장보로 영전함으로써 직원들로부터 지탄을 받음

원래 정치공작은 수사국과는 무관한 기판국(1국)의 업무영역이다. 그런 이유를 들어 정형근 의원도 자신은 무관하다고 해명해 왔다. 그렇다면 왜 수사국에서 정치공작을 하게 되었을까. 국정원의 한 고위관계자(Y씨)는 “당시 국내담당 차장의 지시를 받은 기판국장이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하자 정형근 수사국장이 수사국에서 맡겠다고 자원해서 흑색유인물 살포 공작이 이뤄진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기판국이나 공작부서에서 했더라면 현장 살포 같은 노출된 작업에는 안기부가 관리하는 ‘외곽 조직’을 동원하고 직원들이 직접 나서는 일은 절대 안하기 때문에 신분증을 소지한 채로 체포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정치공작에는 아마츄어나 다름없는 비전문가들인 수사국 요원들이 공작을 하다보니 홍사덕 후보 선거운동원들한테 들키고 신분증까지 소지하는 등 흔적을 남기게 되어 안기부 조직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안기부 내에서는 이 흑색유인물 사건을 당시 민자당 수뇌부와 결탁한 안기부 수뇌부와 정형근 수사국장의 공명심과 비전문성이 또 한번 조직에 상처를 입힌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 사건은 본인의 공명심과 비전문성 때문에 조직에 상처를 입힌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부하들만 퇴출(한기용 등 4명)·징계(수사과장·단장)를 받았고 정작 본인은 수사차장보로 영전한 뒤에 95년 지자체 선거 연기 검토 문건이 폭로되어 안기부에서 물러날 때까지 기판국장, 차장으로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2? 용공 조작 사례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및 가혹행위

○ 89년 6월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 서경원은 85년 4월경 서독 여행중 북한공작원 성낙영에게 포섭되어 88년 8월 체코 프라하에서 북한 특별기 편으로 밀입북한 혐의로 구속되었는 바
*서경원은 89년 6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98년 3월 특별사면(잔형집행면제)으로 출소
- 김일성과 허담 접촉 및 공작금 미화 5만불 수수하고
-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국회와 가톨릭농민회 등을 기반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한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정형근은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서경원 간첩사건과 연계시킬 목적으로
- 직접 조사에 참여하여 주먹과 발로 서경원의 머리, 가슴, 얼굴 등을 무차별 구타하고 구두를 신은 채 발등을 짓밟는 등 가혹한 고문을 통해
- 허담으로부터 받은 5만 달러중 1만 달러를 김대중 총재에게 건네준 사실과 김 총재가 김일성에게 친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등 가혹행위를 통해 김대중 총재에 대한 용공조작을 자행했음.
서경원 전 의원 고문 의혹은 익히 잘 알려진 사건이다. 지난 99년 부산 집회에서의 ‘빨치산’ 발언과 서경원 전 의원 고문의혹이 다시 문제되자 정형근 의원은 1만 달러 부분에 대한 자신의 무관함을 주장하기 위해 “나중에 검찰에서 김대중 1만 달러 수령 부분을 캐내자 나를 문책하는 차원에서 C모 검사를 수사지도관으로 데려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C검사는 최연희 검사(현 한나라당 의원)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진술이 엇갈린다. 다음은 대공수사국장을 지낸 전직 간부(C씨)의 증언이다.
“그보다는 정형근 수사국장이 검찰 선배들한테 함부로 한다는 말을 자주 들은 검찰총장 출신의 서동권 신임 안기부장(서경원 사건 검찰 송치후 박세직에서 서동권으로 부장이 바뀜)한테 찍힌 바람에 서동권 부장이 정형근 국장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최연희 검사를 수사지도관을 데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 업무상 안기부와 접촉이 많은 C 공안부장도 (검찰 후배인) 정형근이 설친 것에 대해 안좋은 감정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노태우 정권 당시에는 김영삼의 행보(합당 이후)가 최대 관심사였는데 대공정보실의 인적 정보는 한계가 있는데 반해 정형근은 당시 수사국장임에도 ‘특별팀’을 구성해 직접 도감청을 통한 생생한 정보를 서동권 부장 책상 위에 올려놓는 바람에 처음엔 정형근을 별로 안좋게 본 서동권 부장의 신임을 받게 되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3? 은폐 축소 조작 사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 관련 박종철(언어학과 3년)을 연행해 조사시 물고문 등으로 치사사건이 발생하자 치안본부로부터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 소집 등 지원을 요청받고
○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단장 정형근은
- 1월14일 심야에 당시 광화문에 있는 서린호텔에서 개최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검찰(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경찰(치안본부장 강민창·나중에 구속)·청와대(공보비서관 김길홍) 등 10여명과 함께 참석하여
- 사건 처리방향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의 발표문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 그후 수차례 시내 앰버서더호텔(1817호)에서 검찰(서울지검 형사부 검사 안상수)·경찰(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 박처원)·청와대(공보비서관 김길홍) 등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소집하여
-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 5공 정권 출범 이래 최대 위기인 만큼 사건이 절대 깨져서는 안되며, 이대로 묻혀야 한다”며 사건 처리방안을 제시하고
- 담당검사 안상수에게 고문경찰관의 구형량을 낮추도록 요구하는 등 고문치사사건 은폐 및 축소조작에 개입하였고
- 당시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조한경 경위를 직접 찾아가 “두 사람만 관련된 것으로 하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어 달라”면서 금품을 제공해 회유하고 검찰·교도소측에 각종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음.

빅종철 사건은 정형근 의원 이력에서 치명적 약점 중의 하나다. 이 사건 관련자들에 따르면 정 의원은 박종철 사건에서 관계기관대책회의 멤버로서 은폐축소 공작에 개입했다. ‘탁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쪽으로 사건을 은폐 조작하는 데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쪽으로 초기의 ‘상황 오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당시 정형근 단장이었다.
당시 은폐축소 혐의로 박처원 치안감이 구속되었다. 현직 치안감 구속은 처음이었다. 박처원은 경찰의 대공수사 초석을 다진 신화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일부러 위장해 일본까지 가서 조총련과 직접 접촉해 조총련에 침투해 대남 침투조직을 파악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정형근은 대공수사 전문가가 아니었다. 한 현익 중간간부(부이사관)은 이런 상황론을 들어 정 의원의 고문 배후 의혹을 평가절하했다.
“당시 상황에서는 누가 고문해라고 지시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지시를 안해도 다 고문하게 돼 있는 상황이었다. 정권안보가 위태로운 상황과 대공기관끼리의 경쟁의식 그리고 간첩·용공혐의자는 고문해도 된다는 오랜 의식과 관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던 때이기에 누가 고문해라고 시키지 않아도 으레 알아서 고문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고문 피해 당사자가 ‘재수없이 죽었고’ 그런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는 대공수사신문은 전쟁에 비견되는 상황이었다. 취조실은 총성없는 전쟁터였다.”
대공분실장을 지낸 한 현직 경찰간부는 이근안 경감의 안기부 ‘출장고문설’에 대해 “더 뛰어난 고문기술자 많은 곳이 안기부”라면서 “보안 경쟁심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고 일축했다. 그는 “다만 간섭도 없이 장기 감금상태에서 고문수사하기에 증거가 없다. 다 나아서 재판을 받기 때문이다. 안기부의 특수성이 경찰과는 달리 쥐도 새도 모르게 데려가 취조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4? 직권 남용 사례
수사국 요원 및 외국어 특기요원 사적 활용

장 재직시 서울대대학원 박사과정에 등록해 수강을 일체 하지 않고서도 위 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 당시 박사학위 논문 작성을 위해 대공수사국 요원을 선발해 기본업무를 전폐시키고 <국제테러의 법적 규제에 관한 연구> 제하의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토록 하였고
- 사법고시 출신 직원을 동원, 작성한 박사논문의 영문 및 교정작업을 시키는 등 수사요원을 사적으로 활용하였으며
○ 역시 대공수사국장 재직시 자신의 위상과 실력 과시용으로 외국에서 발행한 정보기관 관련서적들을 다수 번역하였는 바
- 외국어 실력이 출중한 대공수사국 수사요원을 선발해 업무를 전폐시키고 외국서적 <존 에드거 후버 Ⅰ·Ⅱ> <보리스 옐친> <8월의 쿠데타> <조지 워싱턴> 등 5권의 책자를 번역시켜
-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해 주요 정계·언론계·출신지역 등의 유력 인사에게 발송케 하는 등 수사요원을 사적으로 활용해 직원들로부터 지탄을 받은 바 있음

군조직 등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에서는 이런 식의 조직의 사적 활용이 관행일 수 있었다. 또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전직 국정원 고위간부(J씨·1급 관리관)는 정형근 의원의 재직중 비위사실과 관련해 이렇게 지적했다.
“민주화된 현실의 기준과 잣대로 과거를 재단해서는 안된다. 지금 다시 문제되고 있는 고문치사사건, 고문피해자의 경우 민주화운동과 신념이 있었기에 정권교체도 되고 민주화된 세상 맞이한 것은 일정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상황논리)에서는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다 그랬을 것이다. 87년 상황이 지금 와서 보면 민주화투쟁이고 6·29 항복선언이지만 그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라가 넘어가고 그것은 곧 공산화되는 상황(인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교롭게도 정형근 의원이 수사를 지휘한 대부분의 사건에서 하나같이 고문·가혹행위나 용공조작 시비가 일었다는 점이다. 다만 그 당시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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