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구석기 유적에서도 늑대, 이리, 들개 등 개과(犬科)에 속하는 짐승 뼈는 여러 군데서 찾아졌다. 50만 년 전 유적인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개과에 속하는 짐승 뼈가 나온바 있으며 제천 점말용굴, 단양 구낭굴에서도 그런 흔적이 발견됐다.

개과 짐승의 출현은 인류의 출현과 궤를 함께 한다. 어쩌면 인류보다 먼저 지구상에 나타난 짐승이 개과 동물인지도 모른다. 공룡이 번성하던 쥬라기 시대에 개과 짐승은 그냥 야생 상태로 존재하였다. 호랑이나 하이에나처럼 숲 속에서 먹잇감을 포획하며 자연 상태로 살았던 것이다.

야생의 들개가 가축화 한 것은 농경문화가 시작된 신석기 시대부터다. 사람을 잘 따르고 충직성이 뛰어난데다 영토를 지키고 사냥을 잘 하는 용맹성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첫 번째 가축화된 짐승으로 여겨진다.

신라 지증왕은 개로 인해 왕비를 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육되고 사람과 한 울타리에서 생활해 온 것이다. 개의 조상은 그 생태나 겉모습으로 보아 늑대나 이리로 추정된다.

그런데 개에 대한 동 서양의 관념은 상당히 다르다. 개에 대한 친근감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이나 그 태생적 이미지는 딴 판이다. 김홍도의 그림에서 멍멍이가 달을 보고 맥없이 짓는데 비해 서양의 ‘라자리노’ 설화는 보름달만 뜨면 인간이 늑대로 변한다.

보름달과 늑대인간의 이야기는 서양 문명사의 행간에 간간히 등장하며 때때로 전율을 느끼게 한다. 티베르 강가에서 로마를 건국한 로물로스 형제는 황야에 버려진 채 이리 젖을 먹고 자랐다.

이처럼 서양의 문명사 근원에는 개과 짐승의 시조인 이리나 늑대의 이야기가 전나무 숲 속에서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서양인들이 개고기에 대해 정도 이상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해석해 볼 때 모태(母胎)에 편승한 설화적 흔적의 거부감이다.

개는 눈과 귀가 밝을 뿐만 아니라 귀소성도 뛰어나다. 조선 중종 때에는 전라감사가 개의 귀소성을 이용해 개에게 통신 업무를 맡긴 적이 있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서는 매년 ‘오수 의견 문화제’를 연다. 주인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에 개가 몸으로 뒹굴며 불을 껐다는 이야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개가 울면 집안에 초상이 날 징조라고 했다. 백제 멸망당시 많은 개들이 소부리 왕성을 향해 슬피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 각저총, 무용총, 안악 3호분에는 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망자의 무덤을 지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선시대에는 개 그림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암, 김두량, 김홍도의 그림에서 보면 나무 밑에 개 그림을 배치하고 있다. 물론 집을 잘 지키라는 묵시적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란다스의 개에서는 네로 소년이 버려진 개 파트라슈와 인간, 짐승을 초월한 우정을 쌓는다. 미술학도인 네로 소년은 교회당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보며 늙은 개 파트라슈와 껴안고 죽는다.

“멍멍개야 짖지 마라 꼬꼬닭아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는 건 아깝지 않으나...” 심청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새벽을 알리는 짐승으로서 개와 닭을 꼽았던 것이다,

병술년 개 띠 해 새해에는 진흙 밭에 개처럼 싸우지 말고 페어플레이의 정신으로 지방선거에 임하길 소망해 본다. 개의 부정적 이미지를 내세울게 아니라 긍정적 이미지를 극대화 했으면 한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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