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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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신돈
  • 임병무 고문
  • 승인 2005.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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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의 행간에서 특정인물을 평가할 때 흑백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사람이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31대 공민왕과 정치적 코드가 맞는 신돈, 두 사람은 전 후반기로 나누어 볼 때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같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위 당시 공민왕은 영특한 왕이었다. 개혁정책과 더불어 배원정책을 표방하며 고려국의 주권회복을 위해 힘써 왔다. 1352년에는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해 변발과 호복을 금지시켰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였으며 고려의 모든 제도를 문종대로 돌려놓았다.

또한 내정간섭을 일삼아오던 정동행성과 원나라 복속 이후 1백년이나 존속하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였으며 원 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처럼 영민한 왕인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후에 정사를 신돈에게 일임하고 변태적 황음에 빠졌다. 미소년을 뽑아 궁 안에 머무르게 한 다음 궁녀들과 음행케 하였고 자신은 문틈으로 이를 구경하는 관음증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홍륜, 한안 등을 시켜 왕비를 강간토록 하는 씨 내림의 엽기적 행각도 벌였다. 이로 인해 익비가 임신하자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삼기 위해 홍륜과 그 무리들을 죽이려 했다. 이를 눈치 챈 한안, 권진의 무리들은 오히려 만취한 채로 잠든 공민왕을 살해하였다. 최만생과 홍륜 일당은 이강달, 경복흥, 이인임 등에 의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이 난잡한 과정에서 청주출신으로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딸인 신비 염씨는 왕비들이 능욕을 당할 때 왕명을 거절했고 공민왕이 피살된 후 혜비 이씨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양민이 세도가에게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되돌려 주었고 노비가 된 백성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주었다. 이에 백성들은 ‘성인이 나타났다’며 칭송했고 권문세가에서는 불만이 쌓였다.

1367년에는 성균관을 중영(中營)할 때 그 터를 살피며 ‘문선왕(공자)’은 만세의 스승이다‘하면서 유학을 중흥시켰다. 불가의 몸으로 유학을 권장한 것은 신진 사림의 육성에 있고 그 세력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는데 유용하였다.

개혁론자인 신돈의 세력은 공민왕을 능가하였다. 왕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조하를 받고 출입할 때는 그 의식이 왕의 행차를 보는 듯 했다. 중국에는 신돈이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백관들에게는 영공(令公)으로 불렸다.

신돈은 후에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주색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그러기에 신돈은 출현당시부터 ‘요승’이라며 살해 위기를 여러 번 겪었다. 왕권에 위기를 느낀 공민왕은 친정의 뜻을 밝혔고 권좌에서 밀려난 신돈은 1371년 역모죄로 붙잡혀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제거당했다.

신돈에게는 몸종 반야가 있었다. 미색이 출중한 반야를 공민왕에게 추천하여 동침하게 되었다. 후사가 없던 공민왕은 여기서 아들을 얻으니 그가 곧 우왕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파에서는 우왕,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개국의 빌미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없었던 시대이므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인지, 공민왕의 자식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역사의 영원한 미스터리다. 요즘 MBC-TV 역사드라마 ‘신돈’이 안방극장에서 인기 리에 방영되고 있다. 신돈이 요승인지, 개혁론자 인지는 시청자가 판단할 일이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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