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가 저무는 12월, 우리는 엊그제 평생을 곧게 살아온 한 어른을 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토록 당당하고 꼿꼿하던 분이셨건만 천수(天壽)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인지 엄동설한을 마다 않고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먼길을 떠났습니다. 충청북도지사를 지내고 세 번 국회의원을 역임한 오용운선생. 향년 80세.

인생의 전반은 군인으로, 후반은 정치인으로 산 오용운선생은 평소 ‘장군’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린 시절 어려움을 딛고 꿈을 펼친 군에 대한 자부심과 명예는 그에게 아주 소중한 자산이었습니다.

1926년 12월 26일 진천군 덕산면 인산리108번지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시대상황이 이 그러했듯 가난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소학교마저도 겨우 다닌 그는 46년 해방과 더불어 창설된 국방경비대에 입대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의 꿈을 펼칩니다.

기개가 남달랐던 그는 낮에는 훈련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으로 육사7기로 입학해 48년 졸업합니다. 6·25에 참전한 그는 54년 육군대학을 시작으로 56년 미육군수송학교, 59년 국방대학원, 61년 국민대학 정치과를 졸업하는 등 학구열을 불태웁니다.

그는 국방대학원교수(59), 육군수송학교장, 수송기지사령관(61), 육군항만사령관(62), 육군본부수송감(63) 등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화려한 군 경력을 쌓고는 66년 육군소장으로 예편, 정든 군을 떠납니다.

민간인이 된 그는 68년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으로 발탁되고 71년에는 철도청장에 취임해 국가의 대동맥인 철도행정에 진력합니다.

그가 충북지사로 임명돼 금의환향한 것은 73년 9월. 군입대로 고향을 떠난 지 27년만의 일입니다. 76년 10월까지 꼭 3년 동안 지사로 재임한 그는 77년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선임됩니다.

그는 79년 공화당후보로 공천돼 괴산·음성·진천지역에서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치에 발을 들여 놉니다. 이어 88년에는 청주을구에서, 96년에는 청주흥덕구에서 당선돼 3선의 관록을 쌓습니다. 이후 그는 자민련 전당대회의장, 부총재를 역임하나 건강이 나빠지면서 조용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오용운선생은 군인으로, 행정가로, 정치인으로 국가사회에 이바지한바 그 공로 결코 적지 않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직선적인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지만 강한 자에는 강하고 약한 자에는 약한 남다른 면모를 갖고있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강한 자에 굴종하면서 약한 자에 군림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인성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충북지사로 재임할 때 엄격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부하직원들을 보살폈던 일은 잘 알려진 일인데 훗날 두 번씩이나 진천이 아닌 청주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도 도청공무원들의 여론이 도움이 됐다고 전해집니다.

오용운선생은 하나뿐이던 외아들 원직을 끔찍이도 사랑했습니다. 그 아들이 리비아에서 항공기사고로 주검이 돼 돌아와 천안공원묘지에 묻히던 마지막 순간,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오열하던 그 처절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는 21일 천안공원묘지 일반묘역에 안장됐습니다.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아들 곁에 묻어달라던 생전의 유언에 따른 것입니다. 가족들의 오열 속에 그가 언 땅에 묻힐 때 하늘에서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쌓은 명성이 아니라 인생을 비굴하지 않게 꼿꼿이 살았다는 점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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