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하는가. 최근 부상하고 있는 후보단일화론을 바라보면서 정치권에서는 “노무현의 업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노무현의 업보…. 이 말 속에는 지난 87년 ‘YS-DJ 후보단일화’를 강하게 주장했던 노 후보의 과거가 담겨 있다.
88년 13대 국회에서 정치권에 입문한 노 후보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나 대표적인 YS-DJ 단일화론자였다. 양 김씨의 분열이 군부정권의 연장을 가져온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비판했던 노 후보가 야권통합 운동을 벌이고 YS의 3당 합당을 따라가지 않은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87년 당시 여론추이로 볼 때 1위는 노태우, 2위 김영삼, 3위는 김대중이었다. 후보단일화론은 근본적으로 현실논리가 지배한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누구로 단일화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3위보다는 2위가 결정적으로 유리하다. 따라서 단일화론은 YS와 DJ 모두에게 압박이기는 했지만, 2위 YS보다는 3위 DJ가 더 큰 압박을 느꼈고 불편해했다.
다시 단일화론이 일고 있는 2002년 9월 말∼10월 초 현재 여론조사결과는 1위 이회창, 2위 정몽준, 3위 노무현이다. 87년으로부터 15년이 지난 2002년 오늘, 노 후보는 정확히 당시 DJ의 위치에 와 있다. 단일화 주장에 대해 정 의원은 상대적으로 느긋하고, 노 후보는 불편하다.
재미있는 것은 87년 당시 노 후보는 2위 YS의 양보를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88년 노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 된 직후 YS와 소장의원들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장석화 전 의원이 “그때(87년 대선)는 김 총재(김영삼)께서 양보하셨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노 후보는 자서전 ‘여보, 나좀 도와줘’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갑자기 좌중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YS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지면서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민주당(통일민주당)의 당내 분위기는, 대선 당시에 DJ가 경선 원칙에 따랐어야 했으며 따라서 분당의 책임자 역시 DJ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간에 그런 분위기 속에서 또 그것도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대선 패배의 책임은 몰아붙였으니, YS의 표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노무현)는 장 의원이 공연히 쓸데없는 소릴 해서 분위기를 깨는구나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싶어 YS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김광일 의원이 나섰다.
“장 의원, 그건 그런 게 아냐.”
그리고 김 의원이 이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나서고 말았다.
“아니, 말이야 장 의원 말이 옳지 않습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죠.”
노 후보가 YS에게 이렇게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대선 패배의 책임을 몰아붙일 정도로 DJ로 단일화하자고 주장했던 이유는 YS에 비해 DJ가 개혁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 후보는 “재야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도 YS의 긍정적인 이미지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며 “몇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DJ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사실 등이 대표적인 이유였다”고 말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87년 YS-DJ의 단일화를 강하게 주장했던 노무현. 좀더 개혁성이 강했던 DJ로 단일화하자고 주장했던 노무현. 양 김의 분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던 노무현. 그리고 15년 뒤 당시 DJ의 처지에 놓여 단일화를 압박을 받고 있는 노무현. 노 후보는 현실 정치인 중에서 누구보다도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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