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극장나들이를 한 적이 있다. 시골에서는 영화관을 대개 극장이라고 하였다. 영화뿐만 아니라 악극단 공연, 연극공연, 쇼 공연도 함께 열리던 다목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장에는 남녀석이 분리되어 있었고 뒷자리 임검석에서는 그것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하는 수없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앉았고 어머니는 건너편 여자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가족이 극장이라는 공간에서는 그만 이산가족이 되고 만 것이다. 문화예술의 향기를 공유해야할 가족이 왜 따로 따로 앉아 감상해야 하는가를 할아버지에게 물었다가 ‘남녀칠세부동석도 모르냐’며 알밤만 맞았다.

이런 현상은 학교에서 더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남녀 합반은 꿈도 꿔보지 못했다. 사춘기에 이르러서도 등하교 길 이외에 어쩌다 여학생과 마주치는 것 이외에는 이성간의 만남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성숙한 아이들은 빵집에서 여학생을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여학생과 비교적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은 교회였다. 그곳에서는 성경공부반 등을 통해 남녀학생들이 비로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훈육주임의 살벌한 눈초리도 여기에서는 누그러졌다. 성탄절을 맞으면 교회는 일대 북새통을 치렀다. 신자들이 갑자기 늘어나는데 그것은 교회에서 나눠주는 밀가루나 떡, 구호물자를 타기 위해서다. 천주교회에 특히 많이 몰렸는데 이런 임시적 신자를 가리켜 사람들은 ‘밀가루 신자’라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남녀 예배석은 분리되어 있었다.

개화기, 남녀 유별이 엄격하던 시절에 여성이 교회 예배당에 나와 남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물론 예배장소의 가운데에 휘장을 쳐 가로막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 한 장에서 남녀가 함께 앉아 예배를 드리고 서양선교사, 목사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그 당시의 문화와 사회적 여건 속에서 볼 때 충격적인 일이었다. 남녀평등 사상은 3.1운동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 드디어 1920년도부터는 남녀를 구분하던 휘장이 걷히고 말았다. (전순동, 일제하 충북인의 근대유산과 그 문화)

1919년 민노아 목사가 개교한 청신여학교는 근대 여성교육의 효시이자 요람이었다. 반상을 허물고 여성을 사회로 진출케 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성탄절기에는 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여학생들이 한복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국인들은 한 해 동안 이 학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41.70달러를 제공했다.(충북노회 사료집)

청주기독청년회와 여자기독청년회는 합동으로 청남학교에서 여자야학을 실시하였는데 여러 남녀 청년들의 협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930년 10월 7일부터 시작한 여자 야학은 부인반 11명, 처녀반 56명으로 구성되었고 과목은 한글, 산수, 성경, 일어 등이었으며 봉사한 교사는 김종순, 유인한, 김영기, 권정규, 조윤식, 이성순, 경우숙, 김영신, 김순례, 박철규 등이었다.(기독신보 1930. 12. 10)

남녀칠세부동석은 단순한 예절상의 구분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내외법’이라는 이름으로 법률화 되고 강제화되었다. 이 법도는 예기(禮記)의 내칙(內則)편에서 유래한다. 6세가 되면 수(數)와 방향의 이름을 가르치고 7세에는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지 않으며 8세에는 소학에 들어간다.

이와 더불어 남녀칠세불공식(男女七歲不共食)이란 말도 있는데 이는 ‘함께 앉아서 밥을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녀가 따로 밥상을 차려 먹던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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