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남부 선마이지역 밀라이 마을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이 양민 500여명을 집단 학살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트콩 소탕임무를 수행하던 챨리중대 중대장 캘리중위는 중대원 150명을 인솔, 마을에 들어가 노인 어린이 여성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비인도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른바 ‘밀라이 학살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AP통신을 포함한 많은 미국의 종군기자들이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줄의 기사로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 보도가 될 경우 미국의 ‘국익’에 상처를 입힐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기자들이 ‘애국심’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는 뒤에 한 병사가 맥주집에서 무용담으로 자랑하는 것을 옆에서 들은 유럽의 기자가 특종보도 함으로써 전 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를 놓고 국민들간에 “언론자유가 우선이냐”, “국익이 우선이냐”로 국론이 갈려 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1년 뉴욕타임스는 펜타곤의 월남전 관련 극비문서를 입수합니다. 당황한 국방성은 국가이익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기사화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즉각 법원에 보도중지 가처분신청을 합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이를 숨기는 것 보다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오히려 국익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판단하고 국방성의 요구를 일축합니다. 결국 연방최고법원은 뉴욕타임스의 손을 들어줍니다. ‘진실보도’가 ‘국익’에 앞선다는 판결이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국익우선’ 주장은 사전에 공개돼서는 안 되는 국가간의 외교적 협상이나 국방문제에서 자주 거론되곤 합니다. 그러나 정치 후진국일수록 이를 정권안보로 악용하여 국정 전반에 관해 정보공개를 기피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우리나라에서 다반사로 행해지던 일입니다.

최근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문제 보도를 놓고 MBC가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의 ‘국익’과 ‘진실보도’의 한계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 봅니다. 이번 사태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진실보도가 국익에 우선하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기에 말입니다.

특이한 현상이라면 과거의 국익논쟁이 정부에 의해 제기된 것인 반면 이번의 경우 네티즌들이 나서서 여론의 힘으로 압력을 가해 언론을 굴복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날 언론자유가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어 있어 국가원수인 대통령마저 예외 없이 혹독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취재과정상의 오류가 있었다하더라도 이성적 비판을 통해 잘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집단적인 물리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다하더라도 그것이 성숙한 민주사회의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국민적 영웅’이 된 한 과학자를 보호하기 위한 애국심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에 못지 않은 진실보도를 위한 언론의 노력 또한 보호돼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집단히스테리를 연상시키는 그런 민감한 반응은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신문 없는 정부, 정부 없는 신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일순의 지체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라던 미국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유명한 명구는 언론의 자유 역시 국익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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