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평양 아니면 이북땅 밟지 않을런

인민군-거제수용소-국군 28사에서 7년 복무
이산가족 상봉 신청에도 생사확인 조차 못해

   
수동 달동네 주민 가운데 이북이 고향인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지만 탑박골에 사는 이영실(71) 할아버지의 내력은 남다르다. 6.25 전쟁 당시 체제가 싫어 남하했거나 미군의 폭격으로 피난을 온 다른 실향민들과 달리 반공포로로 석방된 뒤 수동 달동네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평양시 대성동이 고향인 이영실 할아버지는 평양시내 전문대학에 다니던 1949년 20살의 나이로 인민군에 입대했으며, 1950년 6월25일 2사단에 소속돼 3.8선을 넘었다. 집안에서 한 명은 군에 입대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8남내 가운데 막내로 유일하게 미혼이었던 이 할아버지가 군복을 입었던 것인데, 전쟁이 터지면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 것이다.

“3.8선까지는 기차를 타고 이동을 했고 강원도에서 3.8선을 넘어 낙동강까지 이동을 했지. 낮에는 폭격을 피해 숨고 밤에만 걸어서 석 달만에 낙동강까지 갔어”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낙동강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전북 남원에 있는 야전병원으로 후송된다.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이 할아버지는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상황에서 부상병 150여명과 함께 다시 퇴각길에 올랐다. 포로가 된 것은 충북 영동에서였다. 달구지를 몰고 가던 어느 할아버지가 ‘영동 방위대장이 자신의 조카’라며 자수할 것을 권해 달구지를 얻어탔는데, 며칠 동안의 영동파출소 생활을 거쳐 미군에게 인계된 것이다.

“부상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산에 있는 스웨덴병원에서 3개월 동안 깁스를 하고 치료를 받았는데, 퇴원시키면서 바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더라구. 수용소에서 또 3년을 보냈어. 그래가지구 1953년 6월엔가 석방됐는데, 이번에는 군에 입대해야 하더라구”

이 할아버지는 반공포로 1000여 명과 함께 강원도에서 28사단 창설에 참여했으며, 경기도 동두천에서 꼬박 3년을 근무한 뒤 1956년 10월에 인민군과 국군을 합쳐 7년여의 군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후임병 따라 청주 정착 7남매 길러
이 할아버지가 청주시 수동에 정착한 사연도 극적이다. 28사단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보은이 고향인 후임병을 따라 청주로 두어 차례 휴가를 나왔는데, 그 것이 인연이 돼서 제대 후 청주를 찾게 된 것이다.

하지만 평생의 반려자가 된 부인 엄해숙(65) 할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청주에 정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으로 무남독녀인 엄 할머니도 부모님과 함께 청주로 피난을 왔다가 눌러살고 있던 터였다.

졸지에 장인, 장모를 모시게 된 이 할아버지는 살림집을 구해달라고 장인에게 부탁을 했는데, 장인이 잡아준 집이 50평생을 살아온 수동 112-15번지다.

“닥치는 대로 일했어. 장인, 장모를 모시고 7남매를 키우려니까 안해본 것이 없지 뭐”

이 할아버지는 1968년까지 청주시 모충동에 있던 대동유지에서 근무를 했다. 참깨나 들깨, 유채 등의 기름을 짜는 공장이었는데 고향사람이 사장으로 있어 그나마 의지가 됐다.

“시계가 있어 뭐가 있어. 자다깨면 컴컴한 산길을 걸어 회사까지 갔는데 가서보면 새벽 4시고 그렇다라구. 재료더미에 누워서 눈을 붙이고 그랬지 뭐”

이후에도 이 할아버지는 철공소, 수도공사 현장 등에서 품을 파는가 하면, 경운기를 구입해 연탄배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운기를 운전하다 인사사고를 내 복역하기도 하는 등 인생길 굽이굽이가 가파르기 그지 없었다.

이산가족찾기방송 서울서 조카 만나
이 할아버지는 홀홀단신으로 남하했지만 1983년 KBS가 453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방영한 이산가족찾기를 통해 4명의 혈육을 만났다. 역시 인민군으로 남하했던 친조카 2명을 비롯해 피난 내려온 친척들을 만난 것이다.

“그때 애들까지 데리고 여의도를 찾아가 이산가족찾기 현장을 이잡 듯이 뒤졌는데 얼굴로는 조카도 못 알아보겠더라구. 조카들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데, 자주 만나지는 못해. 사는 것이 넉넉하지 못해서 뭘 나눠줄 것도 없구 그래서”

이 할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서 생사확인 신청도 해봤지만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며 답답함을 털어놓았다. 이름을 기억하는 조카만도 30명에 달해 생사확인 요청과 상봉신청을 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이제 조카들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1999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자식들이 금강산 관광을 보내주려 했을때도 이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며 이를 거절했다.

“평양 보통강 건너 대성동에 있는 고향집과 조상묘를 찾아간다면 몰라도 금강산에 갈 일이 뭐가 있냐”는 것이 할아버지의 주장이다.

금강산이 열리고 개성이 열렸으니, 머지 않아 평양문도 활짝 열릴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께 기별도 올리지 못하고 군부대에 섞여 고향을 떠났던 스무살 청년의 잃어버린 50년은 장강의 뒷물에 밀려 이미 흘러가고 없으니, 일제강점과 해방, 그리고 분단의 현실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되고만 우리의 근대사를 탓할 따름이다.

사진/ 육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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