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구석기 시대, 충북지역과 중국 요령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적은 단동(丹東)에 있는 전양(前陽)동굴이다. 단동시 동구현(東溝縣) 채석장에서 발견된 전양 동굴 유적은 1만8천년전의 후기구석기 유적으로 단양 수양개(1만7천년)와 매우 닮아 있다.

이곳에서는 슬기슬기사람(호모사피엔스)의 두개골이 출토되었고 석기는 후기구석기 문화의 대표적 양상인 잔석기(세석기)문화상을 보이고 있다. 석기는 많지는 않지만 석회석, 차돌 등을 돌감(재료)으로 한 떼기 수법은 수양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전양 동굴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곧 한반도에 이른다. 즉 전양 동굴의 인류가 평양 만달리를 거쳐 충북 수양개로 이동한 듯 싶다. 청동기시대 요령성과 한반도는 매우 근접해 있다. 당시의 대표적 칼은 구리, 주석, 납, 아연을 혼합하여 만든 청동검인데 요령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청동검은 칼날이 비파 모양을 한 ‘비파형 동검’이다. 이 동검은 한반도에서도 자주 출토된다.

전남 여수의 한 고인돌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20여 점이나 나왔다. 당시 한반도~요령간의 동검문화 교류 흔적이다. 한반도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약식화 된 세형동검(細形銅劍)이 주류를 이루나 요령지방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많다. 그래서 비파형 동검을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부른다.

심양은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의 심장부다. 한반도와 인접한 까닭에 자연 인적 물적 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우리와 이웃한 국제화 시대의 거점이었지만 좋은 인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과거에 야인이라고 부르던 여진족이 심양을 거점으로 해서 일어나 중국대륙을 삼킨 데 이어 우리에게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준 악연도 있다.

청나라의 세력이 불같이 일어나는데도 조선은 여전히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입장을 취했다. 청태종은 1636년 대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40일간이나 포위했다. 주전파와 주화파로 조정의 의견은 엇갈렸으나 결국 중과부족에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檀)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는 항례(降禮)를 치르고 말았다.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50여만 명에 달하는 조선의 여인들이 볼모로 끌려갔고 삼학사라 부르는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심양성 서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조선의 여인들은 인간시장에서 팔려나갔다. 신분에 따라 최고 값이 1천5백 냥에서부터 매겨졌다. 평양에는 미인이 많다하여 북쪽 여인의 피해가 컸으며 양인은 물론 양반의 처까지 끌고 갔다.

인간시장에서 속전(贖錢)을 물고 나오거나 도망쳐 온 여인들을 가리켜 환향녀(還鄕女)라 했는데 이들은 청족의 아이를 배었거나 몸을 망치어서 고향에 돌아와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서방을 두고 딴 남자와 잠자리를 한 여인을 욕할 때 ‘화냥년’이라고 하는데 이는 ‘환향녀’에서 유래된 것이다.

환향녀들은 고향에 돌아와 친족을 만나면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거의가 실절을 하였기 때문에 남편이나 친척을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이 웃음을 환향함소(還鄕含笑)라 했는데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은 판에 웬 웃음인가.

극한상황에서 돌출된 감정의 돌연변이현상이다. 백성들은 환향녀에 대해 너도나도 이혼을 청구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훼절이기 때문이다. 임금은 맑은 물에 이들을 목욕을 시킨 후 일괄 사면하였으나 엄격한 유교사상으로 무장된 계급사회에서 환향녀들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욕설의 한가지인 ‘호로자식’은 환향녀가 낳은 호로자(湖奴子)에서 연유된 것이다. 오늘날 심양 소가둔구에는 5.5km에 달하는 ‘청주의 거리’가 생겼다. 역사의 아픔을 딛고 조성한 거리이니 만큼 그 의의가 크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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