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보면 어려움에 처한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의 식객노릇을 하면서 일부러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조가 경계심을 갖지 않게끔 하여 살아 남고자하는 술책이었던 것입니다. 이 계책을 일러 ‘도광양회’라 합니다.

또 제갈량(諸葛亮)이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計)를 써서 유비로 하여금 촉(蜀)을 취한 다음 힘을 길러 위(魏), 오(吳)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역시 도광양회 계책입니다.

도광양회(韜光養晦)는 문자 그대로 빛을 감추어 밖에 비치지 않도록 한 뒤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이니 약자가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갈고 닦으며 기다릴 때 많이 인용되는 중국인 특유의 전략입니다.

그런데 도광양회가 밖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삼국지의 고사 때문이 아니라 현대사에서 중국이 취한 대외정책에서 비롯됩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중국은 ‘기미정책’을 정책의 근간으로 삼아왔습니다.

기미란 굴레를 씌워 얽어맨다는 뜻으로 주변국을 자신의 세력 범위 안에 묶어두고 통제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그 동안 초강대국인 미국의 그늘에 가려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덩샤오핑(鄧小平)은 1980년대 개혁, 개방정책을 취하면서 도광양회를 기미정책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의 뼈대로 삼습니다. 이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력이 생길 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면서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피고 전술적으로 협력하는 외교정책을 택한 것입니다.

이후 20여 년 간 도광양회는 중국의 대외정책을 대표해 왔는데 2002년 11월 후진타오(胡錦濤)를 중심으로 한 제4세대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도광양회는 새로운 외교노선으로 대체됩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화평굴기(和平掘起), 유소작위(有所作爲),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이어지는 새 전략입니다. 화평굴기는 위압이 아닌 평화적으로 일어선다는 뜻이고 유소작위는 적극적으로 참여해 하고싶은 대로한다는 뜻이니 이제는 중국이 도광양회를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일까, 이번 부산에서 열렸던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정상회의에 참석한 중국의 후진타오주석의 행보가 최근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듯 해 내외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후진타오는 다른 나라 정상들과는 달리 특별히 청와대에 초청돼 엄숙한 의장대 사열에 정상회담을 갖고 국회연설까지 하는 등 융숭한 예우 속에 한중우호를 과시했습니다.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경주에서 약식 정상회담을 가진 것과 일본의 고이즈미(小泉)총리가 현지에서 냉랭한 가운데 형식적인 회담을 가졌던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과거였다면 역학관계상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연출된 것입니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현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이번 총회의 하이라이트는 21명의 정상들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개최국의 민속의상을 입는 관례에 따른 것이긴 해도 세계의 정상들이 우리 고유의 전통의상을 입고 줄서있는 모습은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 중 에서도 최근의 한일관계 때문일까, 두루마기차림을 몹시 거북해하며 떨떠름해하던 고이즈미총리의 모습은 어쩐지 통쾌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APEC의 백미(白眉)였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명 장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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