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청주 웃다리 농악에 시름 잊고..." <임병무>
한국인이라면 농악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농악은 바로 우리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꽹과리와 장고, 북과 징속에는 우리 배달겨레의 원초적 혼과 신명이 숨어 있다.
도시화, 산업화의 물결속에서도 농악은 퇴출당하지 않는다. 수천년을 이어온 겨레의 울림이자 농경사회, 공동체를 다져온 무형의 구심점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농경사회에서는 일년 내내 농악이 생활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정월 대보름에는 집터를 밟아주고 단오날에는 씨름판의 흥을 돋워주며 한가위에는 둥근 달과 둥근 상모가 어우러지며 명절의 정취를 고조시킨다.
농악은 삶의 몸짓이자 영혼의 분출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한민족의 몸속에 용해되어 있는 까닭에 시시때때로 신명을 불러내어 어깨춤을 들썩이게 한다.
' 까치걸음 칠채가락 신명의 회오리 바람/ 들녘의 한 모퉁이 지신(地神)을 달래고 있다/ 등잔속 수심의 길쌈 청주댁의 한풀이.../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달구는 마당/ 왕산악 우륵 박연 백결선생 뜯던 가락/ 청아한 현이 떨면서 풀어가는 천년의 말/ 꽹과리 세마치 장단 사직벌을 다 적신다/ 우암산도 우렁우렁 무심천도 출렁출렁/ 쇠소리 소지를 먹여 상령산(上嶺山:상당산성)을 오른다'
필자가 쓴 시조 '청주농악' 전문이다. 타악기의 오묘한 합창에 사람들의 어깨짓도 들썩이고 산도 냇물도 화답을 하는 듯 하다. 청솔가지를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중모리라면 폭풍우로 몰아쳐 용트림으로 굿판을 몰고가는 것은 중중모리와 휘몰이다. 마지막에는 다시 실바람이 되어 자연을 잠재운다.
"혀짧은 사람이 말하는 것 처럼 깽깨갱, 깽깨갱 치는 것이 칠채 가락이여, 꽃나부 가락은 덩덕궁이와 비슷하지"
이씨는 꽹과리를 치면서 신명나게 가락의 흐름을 설명한다. 그는 쇠가락도 잘 내지만 개인기도 뛰어나다. 상모를 돌리는 '부포놀음'이라든지 앉았다 일어서는 '까치 걸음' 등 상쇠 놀이가 일품이다. 그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나 기타 대회에서 개인상을 탄 것만 해도 10여회를 웃돈다.
지동동에 있는 그의 집에는 화려한 경력을 말해주듯 트로피와 상장이 방안에 가득하다.
"뭐, 달리 배운건 없어. 어깨너머로 동네 어른들 한테 틈틈이 배운 것 뿐이야. 술은 못 먹어도 꽹과리만 잡으면 흥이 나거든..."
평생을 농악과 함께 살아온 이씨는 건강의 비결이 ꡒ농악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ꡓ고 귀띔한다. 목수 일로 가계를 꾸려갔으나 그를 목수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목수보다 '청주농악 상쇠'로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씨의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보아 이씨와 더불어 청주농악은 충북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신명의 회오리 바람은 청주를 문화예술도시로 가꾸는데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청주농악의 분신은 연변에도 살아있다. 중국 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亭岩村)이라는 마을에 청주, 청원, 보은, 옥천 출신이 약 80호 모여 사는데 청주농악의 웃다리 가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지난 1993년 민요 채집차 만주지방을 답사하던 임동철 충북대교수(국문)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정암촌에는 다 헤진 북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고 한다. 지난 60년대 문화혁명의 회오리속에서 홍위병들이 농악기를 다 부수고 감춰둔 북 하나만 살아 남은 것이다.
임교수는 귀국후 정암촌에 농악기 보내기 운동을 벌여 지금은 농악기와 농악복장 일습을 갖추고 있다. 마침 임교수는 '청주농악 보존회'를 이끌고 있다. 이곳과 정암촌의 농악을 비교 연구해 보면 산업화, 정보화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가락을 되찾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임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