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등산, 지등산, 인등산 지맥이 박달재를 껴안고 연이어 내려오다 돌연 남한강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라는 마을을 남겨두기 위해서일까.

강 건너로 계족산이 보이고 허리 안개가 빠떼루 자세로 산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조동리는 나훈아의 노래처럼 ‘강촌에 살고 싶네’가 절로 나오는 강변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이 세인의 주목을 끈 것은 내륙 중부권의 최대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라는 점이다. 바다가나 큰 강가를 중심으로 발달한 신석기 문화가 이렇게 깊은 내륙에서 꽃 피웠다는 사실은 누구도 몰랐었다. 심지어 1982년 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당시에도 조사대상 목록에 오르지 못했던 곳이다.

이곳은 사람이 찾아낸 것이 아니라 남한강이 찾아낸 유적이다. 1990년 홍수 때, 남한강이 범람하여 조동리를 덮쳤는데 그때 허태행 씨의 밭에서 빗살무늬토기, 그물추, 돌도끼, 돌칼 등이 강물에 밀려 쏟아져 나왔다. 주민의 제보를 받은 충북대박물관은 현장에서 유물 4백여 점을 수습하였는데 이중에는 구멍무늬토기, 겹입술토기 등도 수습됐다.

곧이어 충북대 이융조 교수(고고미술)는 현장을 답사한 바 타제돌도끼. 돌날격지, 몸돌 등 신석기 및 구석기 유물을 다량 수습했다. 타제 돌도끼 26점은 세립질 화강암을 돌감(재료)으로 하여 만들었고 찌르개, 뚜르개, 말 이빨, 뼈 연모 등 구석기 유물도 널려 있었다.

5만 년 전, 중기구석기에 해당하는 르발로아식 몸돌도 출현했다. 몸돌을 돌려떼기를 하고나면 마치 거북 등 모양의 형태가 남는데 이를 르발로아 식 몸돌이라 한다. 5만 년 전 중기구석기부터 1만 년 전 중석기를 거쳐 6~7천 년 전 신석기, 그리고 3천 년 전 청동기가 차례로 드러난 표준유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치레걸이 구슬과 화살촉이 나온 것도 주목할 만하다. 활석으로 만든 치레걸이(목걸이)는 가운데 구멍을 뚫었고 점판암으로 만든 화살촉은 끝부분에 구멍을 뚫었다. 화살촉은 사냥용이나 전투용인데 이처럼 구멍을 뚫어 장식용 또는 호신용으로도 사용했던 것이다.이 유적은 발굴조사에서 예상대로 그 진가를 드러냈다. 수많은 유적 유물이 퇴적층 아래 켜켜이 쟁여있으면서 선사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중에서 손잡이가 달린 붉은 간토기(紅陶)와 안경 식 화덕은 매우 인상적이다.
붉은 간토기는 붉은 색의 유약을 토기 표면에 칠한 것인데 이는 영생과 사악함을 쫓는 벽사의 의미를 띠고 있다. 황석리의 붉은 간토기는 항아리 형이나 이곳에서 나온 것은 술잔모양의 토기다. 전체 높이는 10cm가량 되는데 굽다리 부분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래밭에 꽂아두고 사용했거나 제례용으로 보인다.

안경 식 화덕은 말 그대로 안경 모양의 화덕을 만든 것이다. 강자갈을 이용하여 타원형의 쌍둥이 화덕을 만들어 놓아 연결하였다. 그 자세한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아마 열의 전도를 쉽게 하고 온도를 높이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유적에 선사유적박물관 들어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처음에는 유적이 밀집돼 있는 탑평리7층석탑 부근에 박물관을 지을 방침이었으나 유적의 현장성을 강조하기 위해 현장에 선사박물관을 건립한 것이다.

2003년부터 47억원의 예산을 들여 2320평의 부지에 5백평 규모로 들어선 조동리 선사박물관은 충주시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명물로 등장한 것이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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