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나 아닌 누군가에게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찬바람이 들창을 흔드는 밤, 어머니를 깨운 것은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깨싸움이 벌어지는 아랫목은 우리에게 내주고 가족들의 곤한 잠을 지키려 늘 연탄불을 갈았다. 그렇게 연탄불은 어머니의 삶과 닮아 있다.

연탄처럼 온전히 주고만 가는 것이 또 있을까? 밤새 구들을 데우다 새벽녘에는 은근히 밥을 뜸들이고 하얗게 재가 되어서도 비탈진 세상에 으깨어져 위태로운 발걸음마다 연탄길을 열어줬다. 그런 연탄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지 이미 오래다.

편리함을 이유로 보일러에게 자리를 내주고 연료마저 기름과 가스가 보편화된 것인데, 한 덩이 재로 남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연탄의 정신도 세태에 밀려나 서민들의 삶은 더욱 가파르고 미끄럽기만 하다.

그런데 연탄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기름 값이 오르고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도내 연탄소비가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연탄을 때는 달동네 서민들의 삶이야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이 없다지만 화훼단지나 양계장, 음식점 등에서 연료비를 줄이려고 연탄보일러를 새로 들이는 까닭이다.

이렇다 보니 도내 최대 규모의 연탄공장인 음성군의 경동개발은 2005년 한해 22공탄의 생산량을 약 2000만장으로 잡고 생산라인을 연장 가동하고 있다. 이는 IMF 경제위기 이후 생산량을 대폭 늘린 뒤 그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 수동 달동네에서는 아직도 연탄이 주요 난방수단이다. 연탄을 갈고 있는 윤영일 할아버지. 그냥 이대로가 편안한데… 청주시 수동의 달동네에는 경제사정의 변화와 상관없이 연탄불에 의지해 살아가는 집들이 아직도 상당수에 이른다. 게딱지처럼 낮은 지붕들이 서로 처마와 처마를 기대고 지금도 연탄의 정신으로 온기를 전하며 산다. 수동 달동네 속칭 평화촌에 사는 윤영일할아버지(72세·가명)는 40여년을 한집에서 살아왔다. 막내아들까지 분가하고 지금은 아내와 조카 세 식구가 살고 있지만 굳이 변한 것이 있다면 10년전 연탄아궁이가 연탄보일러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연탄가스가 샐 염려가 있는 아궁이에 비해 보일러가 안전하기는 하지만 방구들이 지글지글 끓어서 간혹 밥을 묻어두기도 하고 아픈 허리를 누이기에도 그만이던 아랫목이 사라진 것은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더구나 몇 년 전부터 들려오는 재개발 소식이 적막하기까지 하던 동네를 수군거리게 만들고 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 가서 이만큼 살겠어? 지금 이대로가 편안한데…” 겨우살이가 늘 염려스러운 것처럼 윤 할아버지에게도 재개발 소식이 달갑지 않다. 그런데 마당 한가운데에 낯선 기계가 있어 물어보니 배지를 만드는 기계라고 한다. 예전 검정교복을 입던 시절 모자나 옷깃에 흔하게 달던 배지가 달동네 서너평 마당에서 예나 지금이나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니 신기해 눈길을 거두기 어렵다. “예전에는 청주에만도 5군데가 있었는데 지금은 나뿐이야. 여기서 다 만들어. 경남 진주에서도 주문이 와” 배지를 만든 지 꼬박 2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곳에서 시간은 얼마나 멈춰 서 있는 것일까. 보일러 옆 광에는 옥수수알처럼 연탄이 차곡차곡 쌓여있는데 300장이라고 한다. “방 3개에 불을 때며 겨울을 나려면 아직도 500장은 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깊다. 이제 재개발이 시작되면 연탄을 갈며 잠을 설치는 겨울은 차차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구석에서 불씨를 이어가던 연탄길도 사라지는 것이다. 연탄 세대에게는 향수로 남을 것 수동 달동네와 함께 도심에서 연탄의 수요를 창출하는 것은 날로 늘어나는 이른바 ‘연탄구이집’들이다. 연탄불을 이용해 고기를 굽는 식당은 오래 전부터 명맥을 이어왔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제는 ‘연탄 특수’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동네마다 문을 열었다. 연탄불구이 식당의 주인들은 은근한 연탄불에 구우면 고기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다’며 연탄불 예찬론을 편다. 여기에다 연탄불에 추억까지 함께 달구며 어려웠던 시절의 향수에 젖어들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굳이 어려웠던 시절을 추억하려는 걸까? 그 것은 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마음처럼 기꺼이 삶의 고난과 맞서려는 조용한 다짐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연탄은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냉난방이 이뤄지고 자동온도조절이 되는 마당에 잠을 설쳐가며 불씨를 이어가는 연탄이 생명력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연탄은 ‘무연탄 가루를 점결제(粘結劑)와 함께 가압하여 덩어리로 만든 연료. 특히 잘 타게 하려고 여러 개의 구멍을 뚫은 원통 모양의 것’에 불과하다. 연탄은 그 색깔처럼 이제 흑백사진들이 가득 찬 추억의 앨범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탄을 기억하는 세대들에게 있어 연탄은 언제나 은근한 온기를 지닌 밑불로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 온기를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려는 연탄의 마음은 온전히 연탄을 알고 있는 세대들의 몫이다. “차로 못가면 손수레로, 아니면 등짐도 좋아”수동 달동네 곳곳에 연탄 배달하는 오기현 할아버지 ▲ 오기현 할아버지.
연탄불에 의지해 삼동을 나는 수동 달동네에 온기를 전하는 사람은 역시 수동 주민인 오기현(75) 할아버지다.

수동 청주시 상당보건소 인근에 사는 오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 담벼락에 붙여 두평 남짓한 연탄창고를 짓고 전화주문이 오면 배달을 나간다.
해마다 10월이 돼야 일거리가 몰려들기 시작해 겨울을 날 때까지 너댓 달 장사이다 보니 “이 것 갖고는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할아버지의 푸념이 너스레만은 아니다.

그래도 10여년 째 이 일을 해오다 보니 수동 달동네에서만은 모세혈관 처럼 퍼진 달동네 골목골목 마다 할아버지의 연탄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평평한 길은 차떼기로 가지” 텔레비전에서나 듣던 차떼기란 단어가 뜻밖에 오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다.

그러나 차가 못가면 손수레가 가고 손수레도 못가는 좁은 골목은 등짐으로 나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22공탄 연탄 한 장 값은 배달 난이도에 구애받지 않고 200원 정도다. 연탄 한 장 값을 물으니 한참 계산을 해야 답이 나올 정도이니 ‘콩이야 팥이야’ 일일이 따지지 않는 것이 오 할아버지의 경영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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