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월19일, 충북 역사상 최대 홍수로 엄청난 물난리
80% 물 속에 파묻혀 … 카메라에 잡힌 현장 참

“한쪽에선 3일을 굶은 어린아이들이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밀수제비를 먹으려고 손을 담갔다가 화상을 입어 울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산모가 보리짚 더미속에서 애기를 낳고 의식을 잃어 간호하기에 너무 힘들었고 아찔한 순간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추교리씨(오창어린이집 원장)는 1972년 단양 홍수 피해 참상을 떠올리며 생각하기 조차 싫다고 했다. 그녀는 첫 발령을 받고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단양군 매포읍 도전 분교 주변 방1칸을 얻어 살림을 차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난리를 겪었다고 한다. 한밤중에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차올라 학교로 달려 갔더니 학교에는 이미 46명의 수재민이 모여 들어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숫자는 점점 늘었다고 했다.

“이튿날 날이 밝고 비가 그치면서 강물이 빠지기 시작했지만 강물이 휩쓸고 간 마을은 쌀한톨 된장독 하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뭐 하나 남김 없이 떠내려 보낸 수재민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교실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군청이나 다른 곳에 연락이 닿지 않아 6학년 남자 어린이 2명에게 보자기를 들려 주고 비행기 소리가 나면 흔들라고 일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다행히 헬기가 아이들을 발견해 소금 한자루 ,밀가루 5포대, 담요 10장, 그리고 냄비 5개를 보급 받았습니다. 급한대로 냄비에 물을 끓여 밀수제비로 허기를 달랬고 담요 10장에 기대어 몇날 몇일을 보냈습니다.

1972년 8월 19일. 이 날은 충북 역사상 최악의 홍수로 엄청난 물난리를 겪은 날이었다. 150년만의 물난리를 당한 단양군청 소재지는 80%가 물 속에 파묻혔다. 8월 20일 경찰국에 출입 하던 기자가 아마추어 무선을 통해 단양 지방에 비가 많이 와 온 동네가 물에 잠겼다는 정보를 듣고 신문사로 돌아와 편집국 간부들에게 보고,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 회의 후 조치원에 있는 항공학교로 두 기자를 보내 헬기 지원을 받아 현지 취재를 하게 했다.

단양과 제천 남한강변은 거의 물속에 잠겨 전기가 끊기고 통신이 마비됐는가 하면 도로 마저 끊겨 모든 소식이 두절됐다. 저녁 늦게 헬기편에 돌아온 기자들이 말하는 취재 현장은 참혹했다. 급히 필름을 현상 ,인화해 단양 수해 사진과 글로 신문 4면을 제작, 아침 일찍 청와대로 5부를 보내 이 사건을 알리고, 필자는 신문 2부와 카메라를 챙겨 청주 육군 병원 광장에 있는 헬기를 타고 단양쪽으로 향했다. 카메라에 잡힌 현장은 참담하고 놀라움 뿐이었다. 수해 참상을 거의 다 촬영하고 연료 보급을 위해 지상으로 내려 오던 중 조종사 무전기에 기쁜 소식이 날아 왔다. 충청일보를 받아 본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이 미8군에 요청, 헬기 3대가 구호품을 싣고 단양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수재민들이 몰려 있는 단양 여중을 찾아 갔더니 4백여명에 이른 주민들이 달려 들어 기자가 왜 이제야 왔냐며 이 곳 소식을 빨리 전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가지고 간 신문을 보이며 곧 구호 물자와 헬기가 오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 얘기하니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단양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청풍에 들렀더니 그 곳 또한 피해가 엄청났다. 필자가 탄 헬기가 한바퀴를 돌아 고도를 낮추는데 갑자기 프로펠러가 고압선 전기줄에 걸려 밑으로 추락했다. 다행스럽게도 강자갈 밭속이 아닌 모래밭으로 떨어져 목숨은 건졌지만 탑승자 모두 중상을 입었다. 허리를 크게 다친 필자는 부서진 카메라를 챙겨 엉금엉금 기어 자갈밭으로 나가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몰려 들었고 필자는 “이 필름을 청주 까지 가져가야 신문을 만들 수 있고 그 것을 보도해야 여러분들을 빠른 시간내에 구할 수 있다”라고 주민들에게 얘기하며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건장한 청년 2명이 나섰다.

그들에게 부축을 받아 리어커에 실려 청풍강에 도착했는데 거센 흙탕물에 건너기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강과 강사이에 긴로프를 이용 간신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다시 리어커와 트럭에 몸을 싣고 밤 11시 제천시청 수해 대책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설렁탕 두그릇에 허기를 달래고 곧바로 청주로 향해 새벽 4시에 도착했고 즉시 사진을 제작, 50장이 넘는 사진을 들고 편집국장을 찾아 화보4면을 증면하자고 제안했다. 그것이 받아 들여져 4면만 발행되던 충청일보가 8면으로 발행되었고 독자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후 각계각층의 도움과 성원이 모여져 힘들고 어려웠지만 서로 도와가며 피해를 복구해 나갈 수 있었다.

단양 지방 수해는 1개시 3개군 13개면 8977세대 49,627명이 피해를 입은 대참사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댐 건설을 계획했고 시기를 앞당겨 1985년에 충주댐을 완공했다. 충주댐이 완공되어 소양강댐과 함께 수도권의 용수 공급과 홍수 조절 기능은 좋아졌지만 수많은 수몰민들은 정든 고향을 물속에 잠기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서울서 소금배가 올라오고 땟목이 내려가던 남한강, 충주호의 푸른물이 가득차고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카페리호의 뱃고동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남한강은 30년전의 악몽을 잊은채 여전히 출렁이기만 한다. / 前언론인, 프리랜서 사진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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