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삶과 잊혀진 인정을 맛보는 곳 <임병무>

인류의 문화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이룩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나서 대화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때로는 다투었으며, 남녀간에 마음이 맞으면 짝짓기에 나섰다. 그러한 현상들의 총체적 집합체가 바로 역사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남'은 역사의 시발점이다. 만남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남녀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원수와의 만남 등등. 그 만남이 평화적 형태에서 큰 규모로 이루어질 때 이를 두고 사람들은 '축제'라 했다.

축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수히 널려있다. 서양에서는 발렌타인 축제, 할로윈 축제, 쌈바축제 등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는 위지동이전에도 언급돼 있듯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등 많은 제천의식을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축제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주로 귀족계급에 의해 주도돼 왔다면 서민들이 주축이 되어 닷새마다 열린 축제의 열린 마당이 바로 우리의 '장날'이었던 것이다. 기자조선, 삼한시대부터 있어온 장(場)의 생명력은 참으로 끈질기다.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숱한 전란과 정쟁(政爭)을 겪으면서도 장날은 억새풀처럼 웃자라며 만남과 축제의 흥 풀이 마당을 흥건히 펼쳐왔던 것이다.

장의 일차적 기능은 경제활동에 있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생산한 소출물을 내다 파는 경제행위가 주목적이며 그러한 필요성에 의해 '장'이라는 모임과 교환의 공동체 행위가 생겨난 것이다.

▲ 육거리시장 전경 그러한 장의 의미는 꼭 경제행위에만 국한되는게 아니었다. 물건을 팔고 사며 마을과 마을간에 소식을 전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떠맡아 왔던 것이다. 윗마을 누구네 잔치날이 언제며 향시(鄕試)에 누가 붙었으며 진사댁 셋째 딸의 미모가 출중하다는 등 온갖 세상 잡사가 장터에서 떠돌았다.때로는 남사당 어름산이(줄타는 사람)의 줄타기 솜씨에 넋이 나갔고 떠돌이 약장수의 입발림에 넘어가 만병통치약(?)을 사기도 했으며 해 걸음 녘에 야바위꾼에 속아 쌀가마 내다 판돈을 홀딱 날리기도 했다.초장부터 해장술에 취해 장바닥에 대(大)자로 누운 탁배기꾼에, 흥정붙임하다 왈짜에 걸려 코피가 터지고 유랑극단의 나팔소리에 가슴 설레던 축제의 마당이었다.전국의 장은 '일월육장(一月六場)'이라고 해서 닷새만큼 열렸고 가급적 인근의 장이 중복되지 않도록 일정을 짰다. 요즘으로 치면 열차 다이얼 시간표 짜는 정도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던 게다.장은 대개 50리 정도를 한 구간으로 하여 섰다. 통신수단이 별로 신통치 못했던 당시이므로 주민의 하루 생활 반경이 이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장돌림(장꾼)의 행보를 고려해서였다. 장돌림이 이 장을 보고 저 장으로 하루에 옮길 수 있는 거리를 대충 50리 안팎으로 잡았다.1980년대 초반까지 충북에는 60여 개에 달하는 장이 섰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숫자가 꽤나 줄었다. 유통구조가 개편되고 대형백화점에다 무슨 마트, 물류센터 등이 잇따라 들어서 재래시장의 위축을 재촉하고 있는 판이다.전화 한 통화면 웬만한 물건은 배달해 주는데다 인터넷을 이용한 홈쇼핑 등 이른바 '장보기'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에 장나들이 횟수가 훨씬 줄어들고 있다. 그런 문명의 파편을 맞아 휘청거리는 곳이 바로 재래시장이요, 청주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육거리 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시대의 바람과 변화에 '흥청거림'이 '휘청거림'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를 강제로 침탈한 일제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폈는데 남석교, 청주읍성 등이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남석교 일대에 들어선 재래시장, 오늘날 육거리 시장이라 부르는 곳에 대해서 일제는 상권을 서서히 장악하려 들었다. 1906년, 청주에 온 일본 상인들은 당시 남석교 북쪽 연안에서 시작되어 청주읍성 남문에 이르는 석교장터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여러 장터중에 규모가 가장 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당시 남석교 장터는 무심천변 모래사장에 포장을 즐비하게 차리는 형태였다. 그때의 번화가는 남석교에서 남문까지였으며, 읍성 안쪽은 한가하였다. 청주읍성 남석교 학술조사보고서(청주대박물관)에 따르면 1906년,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큰비가 내려 무심천이 범람하고 9월 1일에는 읍성안으로 물이 넘쳐 사람들이 남문(청남문)과 서문(청추문) 문루에 올라 물난리를 피할 정도였다.9월 1일 오전 8시쯤에 압각수의 위쪽에 있는 담장(둑)이 무너지고 한 줄기의 물은 읍성 동쪽의 해자(垓字:성 둘레에 파놓은 참호로 방어시설의 일종)처럼 된 물길을 따라 넘쳐 북문 바깥으로 나갔다.한 줄기는 읍성 서남쪽의 제방을 넘어 휩쓸고 나가 재래시장은 겨우 3집만 남고 모래사장으로 변했다. 당시 남문 밖의 민가를 포함한 유실가옥이 200여호에 달하였다. 9월 5일에 이르러서야 비가 멎고 휩쓸린 자국만 남게 되었다. 남문에서 남석교에 이르는 시장일대가 폐허로 돌변한 것이다.이 천재지변은 일본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장을 만들게 하는 구실이 되었다. 모래로 변한 땅의 소유자들이 토지를 내놓았고 일제는 점포를 짓고 부강과 조치원으로 통하는 도로를 정비하였다.1906년, 한국정부는 일본에게 재무의 처리를 위임하였다. 그 결과 청주의 모든 재정을 일인이 관리하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일인 상인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여 시장의 상권을 크게 잠식한 것이다.육거리 시장은 구 석교동 파출소 일대에서 북진하며 청주시의 간선도로를 따라 발전해 왔다. 주로 남북으로 발달했던 시장은 6.25전쟁이 지나면서 모양새가 바뀌었다. 즉 남북축으로 늘어섰던 시장의 형태가 동서축으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바둑판식 시장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바둑판식이란 자(尺)로 잰듯한 규격이 아니라 눈대중으로 쳐서 씨줄과 날줄을 얼기 설기 엮은 모양을 일컫는다. 여기에다 수백명에 달하는 노점상이 가세하여 육거리 재래시장은 혼잡하기 이를데 없다.가끔 '재래 시장엔 질서가 없다'고 혹자는 말하는데 필자의 의견은 좀 다르다. 시장의 속성상 질서가 좀 부족한데가 시장이 아닌가. 비좁고 혼잡하고 어깨를 부딪치고, 그것은 시장만이 갖고 있는 생활의 풍속도이다.재래시장이 너무 혼잡해도 고객에게 불편을 주지만 무슨 할인점처럼 정찰제를 실시하고 일목요연하고 질서정연하면 재래시장으로서 별 맛이 없다. 싸다느니 비싸다느니 흥정붙임이 요란을 떨고 덤도 주는 그런 맛에 재래시장을 찾는게 아닌가.계란을 한줄로 질서정연하게 쌓으면 몇줄을 못 쌓아서 무너지고 만다. 있는 그대로 건성건성 쌓아야 든든한게 계란 쌓기다. 재래시장의 질서는 마치 계란 쌓기와 같은 '무질서 속의 질서'라는 자연의 법칙속에 존재한다. ▲ 바가지를 한줄로 꿴 바가지 장수
육거리 시장엔 없는게 없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은 모두 갖추고 있다. 우선 푸짐한 먹을거리에서부터 입을거리, 멋낼거리가 풍족하다. 각종 육류, 생선류, 피복, 그릇 등이 가게마다 산더미 같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족발을 보면 대번에 소주 한잔이 생각난다. 나무로 만든 간이 의자에서 순대랑 빈대떡이랑 함께 먹는 막걸리 맛도 일품이다. 흥정을 하기전에 잔 멸치 한 두 마리쯤 맛을 보는건 흉도 아니고 뭐라는 사람도 없다. 그게 재래시장의 인심이고 또 강점이다.

물건만 푸짐한게 아니라 현대생활에서 잃었던 인정을 맛보는 곳이 바로 재래시장이다. 바뀐게 있다면 시설의 현대화다. 고객이 불편하다 하여 아케이트 공사를 하고 손수레인 카터를 들여놓고 화장실도 지었다.

대형 할인점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이 모두가 불가피한 조치다. 외국에서도 재래시장은 물건을 바꿔 쓰는 '벼룩시장'을 비롯하여 토산품 등을 파는 프리어마켓이 관광 명소로 인기를 끈다.

값도 헐하고 그 나라, 그 지방의 풍물을 구경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대형매점을 이길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인 것이다. 육거리 재래시장에는 아직도 튀밥집 등이 있다. 그런데 이 튀밥 기계도 많이 변했다. '펑이요'하는 소리와 함께 튀밥을 튀기는게 아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온 라인으로 돼 있다. 장작을 쪼개거나 관솔불을 지피는게 아니라 가스가 이를 대신하고 손잡이 수동식은 모터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일정 시간만 지나면 그냥 튀밥이 생산된다.

김 굽는 기계도 마찬가지다. 아낙들이 청솔가지로 일일이 기름 소금을 발라 석쇠에 한 장씩 넣고 굽는게 아니다. 기름 소금을 바르는 일, 온도를 맞춰 김을 굽는 일이 자동화돼 있다. 명주타래에서 실 뽑듯 연신 구운 김이 기계를 통해 나온다.

생선가게 주인의 손놀림은 능숙하다. 손님의 요구에 따라 생선내장을 척척 발라내고 토막을 내 주는 손 동작이 잽싸다. 칼 도마는 소나무나 물푸레나무가 제격이다. 소나무는 소독작용이 있고 물푸레 나무는 벌어졌다 쉽게 오므라 드는 물성(物性)이 있기 때문이다.

'자, 떠리미요 떠리미' 해가 서산에 기웃거지자 마음이 급해진 트럭 노점상이 나투리를 헐값에 판다. 태양이 매일 떠오르고 지듯이 육거리의 흥정은 매일 계속된다. 특히나 2일, 7일 서는 청주 장날이 오면 육거리 재래시장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수백명의 노점상들이 새벽부터 인도(人道)까지 점령한다.

예로부터 장사는 몫이 좋아야 잘 된다. 노점상을 할라치면 자리 싸움부터 배워야 한다. 이 또한 생존경쟁을 위한 불가피한 전투다. 시장바닥에 근거를 둔 노점상이외에도 시내버스가 닿는 인근 지역에서 원정(?)온 노점상도 적지 않다.

봄이면 달래, 냉이, 씀바귀, 벌금자리가 봄내음을 도시로 전하고 여름이면 상추 쑥갓 등 소채류가 지천이다.

전통 5일장이 공식적으로 폐쇄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지만 생활의 습성은 바꾸어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청주 장날이 오면 수많은 장꾼들이 육거리에 몰려 삶의 애환을 이렇게 엮어간다. <임병무>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