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개국과 충북사람의 인연은 꽤나 깊다. 경문왕의 서자인 궁예는 어린시절. 청주에서 숨어 살았다는 일화가 이 고장에서 전해진다. 어릴 때, 정변으로 한 쪽 눈을 잃은 궁예, 그는 새 왕조의 꿈을 안고 청주 지역 구라산성(구녀산성)근처에서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엘 보면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 상당산성 절 집에서 거주하던 승장(僧將) 영휴(靈休)의 기록이다. 그는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고 작강(鵲江:까치내)변에 견훤과 대치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02년 6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실시한 상당산성 발굴조사에서 궁예 때 쌓은 성벽이 나왔다. 상당산성은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인데 돌연 산성 서쪽 벽에서 후삼국 시대에 쌓은 성벽이 나온 것이다. 당시 성벽은 토사에 덮여 있어 그 실체를 몰랐는데 흙벽을 거두어 내자 궁예 때 쌓은 성벽이 서린 이끼를 보듬고 나타났다.

그 성벽은 잘 쌓은 곳과 대충 쌓은 곳이 혼재되어 있다. 잘 쌓은 곳은 그랭이질(퇴물림) 수법이 나타나나 적당히 쌓은 곳은 성돌을 지그재그로 쌓지 않고 일렬인 통줄눈으로 쌓은 것도 나타났다. 세로가 통줄눈이면 안전성이 매우 떨어진다. 이를 테면 부실공사인데 이는 강제노역에 따른 역효과인 듯싶다.

궁예가 철원에 태봉국을 세울 당시, 청주사람 1천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키는 대대적 이민정책을 편다. 여기에는 학설이 구구하나 대체적으로 궁예의 세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임춘길, 아지태 등이 청주사람의 수장으로 있었는데 특히 아지태는 왕건과 더불어 궁예의 2인자 자리를 다투다 밀려났다. 이 때 지도자급 청주사람들은 대부분 숙청당하였으니 역사란 때로는 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잡초는 베어내도 또 일어나는 것이다. 왕건이 송도(개성)를 왕도로 삼을 때 청주사람 이가도(李可道)를 중용하여 23km에 달하는 나성(羅城:외곽성)축조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개성보다 역사가 훨씬 깊은 청주는 이미 고려 태조가 두 번씩 행차하여 나성을 축조하였다. 아마도 그 나성축조의 노하우를 개성에 적용한 것 같다.

이가도의 본명은 이자림(李子琳)인데 고려 태조가 특별히 성씨를 하사하여 이가도에서 왕가도(王可道)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의 딸은 현종의 9비 원질귀비(元質貴妃)와 덕종의 제2비 경목현비(敬穆賢妃)가 되었는데 이들은 자매간이다.

3대 임금인 광종은 951년 개경에 두 개의 원찰을 건립한다. 하나는 아버지 태조의 원찰인 봉은사(奉恩寺)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후를 위한 불일사다. 그로부터 3년 뒤 충주시 신니면에 어머니를 위한 원찰인 숭선사를 다시 건립한다. 신명순성왕후는 왕건의 셋째부인으로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이다.

개경에는 수백 개의 사찰이 있었다. 현화사, 불일사, 광명사, 보제사, 영통사 등이 중심사찰인데 조선개국과 더불어 대부분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천태종을 개창한 곳은 오관산(五冠山)자락에 있는 영통사(靈通寺)다. 16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영통사를 우리의 천태종이 중심이 되어 남북이 합작 복원한 것은 예삿 일이 아니다. 아마도 통일의 지름길을 불타가 밝혀주는 듯싶다.

충북과 개경, 그리고 현대와 고려의 인연은 천년 세월이 흐름에도 그 질긴 역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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