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에서 태어나 세월의 바람 서리 맞으며 80년

대한불교수도원 자리 신사철거에서 일제 패망 실감
화려한 기마 경찰 시절 5·16으로 종지부

마을 어귀를 지키는 동구나무처럼 청주시 수동에도 세월의 풍상을 맞으며 자리를 지킨 나무와도 같은 인생이 있다. 어느덧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얄팍한 세상에서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는 삶이었다.

1926년 청주시 수동 338번지(대성로 서쪽, 영생약국 부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노무자로 일했던 1년을 제외하고는 한시도 수동을 떠나지 않은 맹일하(80)할아버지가 그 주인공이다. 맹일하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수동 1·2구를 합쳐 50여호에 불과하던 유년의 수동에서부터 해방과 전쟁, 근대화의 길을 걸어온 수동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역사의 유구함에 비춰볼 때 짧다면 찰라와도 같은 80성상이지만 그 하루 하루가 격변의 세월이었던 만큼 유성기 판에 긁힌 스크래치처럼 입을 열면 때로는 삶의 보람과 희열이, 때로는 아픈 기억의 편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 맹일하(80), 이강순(75)부부가 수동 중부경로당 앞 채마밭에서 사진기 앞에 섰다. 두 부부는 6.25 전쟁 중이던 1951년에 중매로 결혼해 50여년동안 서로를 지키며 살아왔다. / 사진=육성준 기자
일본군-미군-국군부대가 거쳐간 동네

맹일하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일제강점기 당시 수동의 옛 이름은 ‘시부대청’이다. 유년기에 그렇게 불렀는데 어원을 따져보니 일본군 수비대가 머물던 마을이라 ‘수비대청’이 됐고 입에서 입을 거치며 시부대청이 됐다는 주장이다.

할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 지어진 이름이라 수비대가 일본군 부대인지 구한말 우리나라 군대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나중에 일본군 병사부가 들어서면서 군부대 주둔의 역사가 이어진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캠프를 차렸고, 6.25전쟁 후에는 23육군병원이 들어서 1960년대 말까지 현존했으며, 다시 그 자리에 군 보안부대가 들어섰다가 1980년대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맹 할아버지는 “미군이 막사를 차리더니 어찌나 소독을 해대던지 그때는 모기 한 마리도 구경할 수 없었다”며 미군 주둔 시절을 회상했다. 우암산 자락에 위치한 수동 달동네도 6.25전쟁의 와중에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육군병원 인근에 일자형의 판자집을 짓고 산 것이 시초가 됐다. 당시 주택들은 사유지와 공유지가 무단 점유된 채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집수리는 상황에 따라 이뤄졌지만 구불구불한 가로체계는 손대지 않다가 마을이 조성된지 50여년 만인 2004년 11월부터 소방도로를 만들고 공용주차장 7군데 등을 만드느라 중장비 소리가 요란한 상태다.

사방이 뽕밭과 논, 신사가 주요 시설
일제강점기에 수동에 민가가 있던 곳은 교육과학연구원 위에 조성된 동네와 맹 할아버지가 태어난 영생약국 부근 등 두 곳이 전부였다. 현재 주성중학교 자리 등 우암산 쪽은 뽕밭과 논밭 뿐이었고 민가라고는 산지기들이 사는 오막살이 한 두 채 뿐이었다.

1937년 쯤에는 탑동에 있던 신사가 현재 대한불교수도원 자리로 이사를 왔는데, 맹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서도 그 날의 풍경이 선명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아이들한테까지 모찌(떡)를 나눠주며 잔치를 벌였는데 대단했어” 신사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닦고 현재 고인쇄문화전수관(구 수동사무소) 앞에서부터 ‘도리이(鳥居·신사 입구에 서있는 ‘天’자 모양의 문)’를 세우기 시작해 신사 앞마당까지 모두 3개의 도리이를 세웠다는 것이 맹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이후 할아버지는 아침 저녁으로 황성요배를 강요당했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신사 앞마당을 쓸어야 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패전한 일제의 몰락은 기세가 등등하던 신사의 철거로 상징화됐다.

“미군 GMC트럭이 신사 기둥에 쇠줄을 묶어 당기니 순식간에 무너지더라구. 목재는 다 갖다 장작으로 때고, 구리 지붕은 고물상들이 다 주워갔어” 맹 할버지가 두 눈으로 확인한 제국주의의 몰락이었다.

일본군 총 절도 혐의로 고초, 기마경찰이 되다
1943년 공부도 하고 돈도 벌기 위해 이른바 ‘산업전사’가 되어 일본 오사카 근교의 공장에서 일했던 맹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참지 못해 1년도 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온 뒤 이듬해 감격의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후 맹일하 할아버지의 첫 직업은 기마경찰. 1949년 제천에서 공비토벌대로 경찰에 입문한 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을 따라 잠시 참전했다가 충북경찰국 경비과로 발령을 받는데, 기마경찰대는 바로 경비과 소속이었다.

“경찰의 꽃이었지. 교통정리도 하고 데모진압도 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행사에 앞잡이를 서는 의전용이었어. 당코바지에 말장화를 신고 권총을 차고 앞장을 서면 부러운 시선을 한눈에 받았어” 당시 기마경찰이 예닐곱 명에 불과했다고 하니 희소성에서도 단연 빛났던 것이다.

그런데 맹 할아버지가 경찰이 된 사연이 이채롭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병사부 무기고에 있던 구식 장총이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맹 할아버지 집의 세입자가 부서진 무기고 자물쇠로 엿을 바꿔 먹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맹 할아버지가 무기 탈취 용의자로 지목돼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이다.

“도대체 군·경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다 잡아 죽이나 싶어서 해방이 되고 경찰이 됐어. 그런데 일제시대 청주역 부근에 있던 조선운송주식회사 마차운반계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말을 타 본 경험이 있어 기마경찰대로 뽑힌 거야” 맹 할아버지는 야구와 축구, 탁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날랜 운동신경 덕분에 단연 으뜸이었다고 수줍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5.16 군사쿠데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그러나 해방과 전쟁으로 굽이치는 역사 속에서 평온을 원하는 소박한 개인의 삶은 강물 위에 떨어진 낙엽과도 같았다. 1957년 돌연 기마경찰대가 해체되면서 맹 할아버지는 이른바 구조조정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다른 대원들은 해체 뒤에도 경찰에 남아 몇몇은 훗날 서장자리까지 꿰찼지만 맹 할버지는 아버지가 야당 정치인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정치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이미 눈엣가시처럼 주목을 받아온 터라 꼼짝없이 옷을 벗어야 했다.

경찰에 복직할 기회가 온 것은 4.19혁명 이듬해인 1961년 1월이었다. 1948년 4대 민의원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청주시 수동 출신의 야당지도자 이민우씨가 “6개월에 한 번씩 승진시켜 주겠다”며 뒤를 봐준 덕분이었다.

멍에를 벗자마자 양탄자 위를 걷는 호사가 펼쳐지는 듯 했지만 5개월 뒤 다시 칼바람을 맞아야 했다. 5월16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정치적 배경으로 관에 들어온 공직자들을 제거한다’는 군부의 방침에 따라 ‘야당 빽(?)’을 등에 업었던 맹 할아버지는 6월24일 경찰과의 인연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이후 맹 할아버지는 주성초등학교(졸업 당시에는 심상소학교) 28회 동기인 국회 정태성의원의 추천으로 전매청, 대성연탄 등에서 일하다 1970년 사양길에 들어선 연탄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일손을 놓게 된다.

맹 할아버지는 IMF 당시 맏아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재산도 재산이지만 협심증이 찾아와 건강도 많이 악화됐다. 그러나 2001년부터 3년 동안 인근 노인복지회관에 나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때를 밀어주는 등 목욕봉사를 하며 아름다운 회향을 준비하고 있다.

공비토벌대로 활동하다 6.25에 참전했지만 2002년 11월에야 참전유공자로 인정돼 이 때부터 월 6만원의 생활비 보조를 받는 것이 지나온 삶에 대한 인정이라면 인정이다.

맹 할아버지는 그러나 “자랑할 일도 못돼. 세상이 바뀌어서 남북이 화해하는 마당에, 세월이 더 흐르면 공을 인정받을 일이 아닌지도 몰라”라며 시대상황에 짓눌린 지난 날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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