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변하지 않는 한 ‘화해’는 없다”
불공정·왜곡보도에 적극적으로 대응 … “원칙 포기 않는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직후 기자들 사이에서는 한때 ‘노무현-<조선일보> 화해설’이 돌았다. 국민경선 때야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조선일보>와 각을 세웠지만 언제까지 최고 부수를 자랑하는 ‘제1의’ 신문과 대립을 하겠느냐, 대통령 후보가 된 상태에서 <조선일보>와 계속 척지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는 게 화해설의 근거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불과 4개월도 안 남긴 ‘긴박한’ 상황인데도, 노 후보와 <조선일보>의 화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대통령이 되고 나면 서로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추측은 하지만, 적어도 대선 전에 양쪽이 화해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최근 ‘신(新)보도지침’ 파문으로 이회창 후보와 MBC와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자, 이런 갈등과 노무현-<조선일보>의 대립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몇몇 사람들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이제는 ‘간 큰 후보들’이 유력 신문이나 방송과 ‘맞짱’을 뜨고 있다며 흥미롭게 여기기까지 한다.
노무현 후보의 언론 보좌진들은 이런 비교 자체를 불쾌해 한다. 형식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게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천지 차이라는 것이다.

<주간조선> 보도가 ‘악연’의 뿌리

노 후보의 한 참모는 “노무현 후보는 불공정 보도의 피해자로서 <조선일보>와 맞서는 것이고 이회창 후보는 자신에게 유리한 보도를 끌어내기 위해 MBC에 압력을 가하는 것인데, 이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언론개혁을 위한 노력과 언론통제를 위한 몸부림이 똑같이 평가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노무현 후보와 <조선일보>의 ‘악연’은 뿌리가 깊다. 91년 9월 노무현이 초선으로서 통합민주당의 첫 대변인이 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노무현 대변인에 대한 <조선일보>의 프로필 소개는 이례적이었다.
“과거 5공 청문회 당시 돋보이는 활동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됐던 고졸의 변호사 출신. …그러나 의원직 사퇴서 제출 촌극을 빚는 등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는 지적도. 한때 부산요트클럽 회장으로 개인 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져 있다.”
즉시 노 후보는 “요트를 취미 생활로 탄 일은 있으나 척당 200만∼300만원이었고, 변호사로서 가난뱅이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기준의 재력가는 아니”라며 “이런 보도가 다시 재인용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언론사들에 해명서를 돌렸다. 이게 화근이었다. 보름 후인 91년 10월 6일자 <주간조선>에서는 ‘밀착취재: 통합야당 대변인 노무현 의원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장문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노 후보는 소송을 제기해 법원으로부터 2000만원 손해배상이라는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91년 <주간조선> 기사 복사본은 올해 민주당 국민경선 때 상대편 후보 쪽에 의해 다량으로 뿌려져 잡음이 일기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상대 후보의 공보특보는 <조선일보> 출신이었다.
노무현-<조선일보> 간의 갈등이 일반인들에게 다시금 부각된 것은 지난해말 당시 노무현 상임고문이 “앞으로 <조선일보>와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
지난 7월 노 후보쪽에서는 <조선일보>에 실린 ‘말 못하는 노무현’이라는 기사에 대해 언론중재를 요청해 ‘반론보도’ 결정을 얻어냈고, 끝내 <조선일보> 지면에 노 후보 명의의 반박 글을 실었다. 이는 앞으로 벌어질 <조선일보>와의 싸움에서 더 이상 ‘선전전’이 아닌 ‘행동전’으로 임하겠다는 뜻으로, 향후 노무현-<조선일보>의 관계를 읽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홈페이지에 ‘미디어 비평’ 만들어

한 발 더 나아가 최근 노 후보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언론 전략을 펴고 있다.
9월초 노무현의 개인 홈페이지(www.knowhow.or.kr)에는 ‘무현정론’이라는 새로운 코너가 만들어졌다. ‘무현정론’은 한 마디로 노무현식 ‘언론 클리닉’ 코너다. 각 언론에 보도된 노무현 관련 기사 가운데 사실과 다르거나,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경우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노 후보.쪽에서는 “언론보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보다는 건전한 비판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서 만든 코너“라고 말한다. 노 후보 진영의 남영진 언론특보는 노무현이 <조선일보>와 벌이는 싸움을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라면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벌써 화해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 이후에도 <조선일보>와의 싸움을 계속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남 특보는 “중요한 것은 <조선일보>와의 화해 여부가 아니라 <조선일보>가 특권의식을 버리고 불공정·왜곡 보도를 하지 않는 건전한 매체로 거듭나는 것”이라며 “설령 대통령이 되지 못하더라도 이 문제만큼은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노 후보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와의 대결이 간단해 보이면서도 복잡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

<조선일보>, 92년 ‘정주영 변수’ 올해도 들고 나올까?
양자대결구도로 몰아 대선판도 특정 후보에 유리하게

92년 14대 대선 때 한창 논란이 됐던 <조선일보> 칼럼이 있다. 류근일 칼럼이 그것이다. 그는 조선일보 1992년 11월 28일 ‘정주영 변수’란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해 논란을 가져왔다.
“이번 선거의 뇌관은 정주영 후보가 쥔 꼴이 됐다. 그가 만약 ‘굉장히 많이’ 득표를 하면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 반면에 그가 ‘적당히 많이’ 득표를 할 경우엔 그는 김영삼씨를 떨어뜨리고 김대중씨를 당선시킬 것이다. … 우선 정해야 할 것은 양김씨 중 누구를 고를 것인가 위주로 판을 봐야 할지, 아니면 양김이냐 정씨냐 위주로 판을 봐야할 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 만약에 후자의 경우라면 그땐 양김씨와 정주영씨의 ‘모든 것’을 이 잡듯 샅샅이 뒤져내서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일체의 공사생활에서 ‘구석구석’에 있어 정씨가 과연 양김씨보다 나은 점수를 딸만한지, 아니며 그들만도 못한지를 날카롭게 가려내야 한다. … 이런 식으로 해서 40% 안팎의 미정표 유권자들은 이제 ‘정주영 변수가 작용하는 3자 대결 구도’에서 자신의 선택을 좁혀가야 한다. 정주영씨에게 ‘굉장히 많은 표’를 허락함으로써 그를 당선시킬 것인가, 또는 그에게 ‘적당히 많은 표’가 가게 함으로써 김대중씨를 당선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 ‘아주 조금만’표를 줌으로써 김영삼씨를 당선시킬 것인가….이 세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유권자들은 투철한 판별력으로 그들의 도덕성과 진실성의 높낮이를 정확하게 꿰뚫어보아야 할 것이다.”
얼핏 보면 세 후보 모두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핵심은 정주영 후보를 깎아 내리는 데 있다. 우선 후보에 대한 각각의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양김과 정주영씨로 가름으로 정씨를 동떨어진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대선의 구도를 3자 대결이 아닌 양김 대결이나 양김과 정씨의 대결로 단정지으며 정씨의 당선을 완전히 배제하는 어투로 일관하고 있다. 이 칼럼은 차후 큰 논란거리가 됐으며 <조선일보>와 정 후보의 대립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조선일보>의 주장은 반DJ 친여 성향 유권자들로 하여금 김영삼 후보로의 전략적 투표를 유도했고, 이 같은 시도는 결국 성공했다. 따라서 역시 다자 구도로 재편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이번 대선에서도 <조선일보>가 10년 전과 같이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유사한 주장을 펼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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