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리나 씨 인터뷰

박이리나 씨.
박이리나 씨.

최근 청주 복대동과 봉명동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크게 늘고 있다. 주로 중앙아시아인들인데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또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가족 단위로 청주를 찾고 있다. 봉명동 지역에는 이미 이들만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고, 청주시에서도 이들을 위한 생활 및 언어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지자체에서 외국인들을 돕는 사업이 진행된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녹록해진 것은 아니다.

일단 언어가 문제다. 제대로 글을 읽고 말을 할 수 없으니, 기본적인 생활부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병원 가는 것, 마트 가는 것,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 등등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여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해진다면 그 힘듦은 배가 된다.

그래서일까? 수년전부터 이들의 눈과 입이 되어 도움을 주고 있는 박이리나 씨(48)의 ‘선행’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무료로 통역을 해주는 것은 물론, 외국인들이 청주에 정착하기까지 겪는 어려움을 두 팔 걷어 부치고 돕는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이 있다면 일자리를 연계해 주고, 지원기관·단체를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SNS상에서 모금 활동도 한다. 도움을 받는 외국인 입장에서는 ‘구세주’일 수밖에 없다.

지난 1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건강보험 적용을 못 받는 한 외국인이 몸이 아파 입원을 했는데 하루 입원비가 무려 80만원이 나왔단다. 돈이 없어 난감해하던 외국인을 보고 박 씨는 모금활동을 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지인들과 주변 친구들, SNS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끝에 그 외국인은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어린 아이를 키우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는 기저귀와 분유, 옷을 후원받아 전달하기도 한다.

 

박이리나 씨의 고단했던 한국생활

박이리나 씨가 이렇게 ‘외국인 돕기’에 두 팔 걷어 부치고 적극 나서는 것은 그만의 각별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 또한 ‘한국살이’가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난 박 씨는 고려인 3세로, 2003년 할아버지·할머니의 나라를 찾아 인천으로 왔다. 인천에서 처음 시작한 ‘한국살이’는 두려웠고, 고통스러웠고, 아팠다. 여권 기간을 빌미로 임금 체불을 당했던 기억, 식당 종업원으로 손님에게 성추행을 당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사장으로부터 비난받았던 기억, 전 재산 몇 만원을 움켜쥐고 거리를 배회하던 기억. 그는 당시를 고달픈 기억만 남은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박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한국어가 조금이라도 되었다면 상황이 조금은 괜찮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한다.

다행히 절망 속에서 만난 목사님 덕에 무사히 한국살이를 할 수 있었고 정착하는데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이리나 씨는 목사님을 ‘구세주’라고 표현했다.

닥치는 대로 한국어를 공부한 끝에 이제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구세주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외국인들의 ‘언어 지원’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절감했기 때문이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돈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이 도와주고 싶고, 특히 나와 같은 어려움을 가진 이주민에게는 마음이 더 쓰여요.”

활동비를 받는 통역 일보다, 돈은 받을 수 없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곳에 더욱 정성을 쏟는 이유다. 현재 그는 통역비를 낼 형편이 안 되는 가정에 무료로 통역을 해주고 있으며 서부종합사회복지관 프로그램에도 참여, 외국인들이 마을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박 씨는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주민 이웃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맙고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서부종합사회복지관 2월호 소식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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