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단풍으로 물든 국립공원속리산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랫마을 은행나무들은 성급히 황금색 잎들을 땅 위로 떨구기 시작했지만 산중의 울창한 나무들은 지금 한창 색동옷을 뽐내느라 한창입니다.

문자그대로 만산홍엽(滿山紅葉), 시절은 바야흐로 만추(晩秋)로 접어듭니다.

설악산이 어떠네, 내장산이 어떠네, 사람들은 제각각 말을 하지만 내 고장 명산 속리산 또한 빼어난 산세에 단풍이 아름답기로 뒤질게 없으니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여름 내 뜸하던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전국에서 모여들면서 속리산은 모처럼 생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속세를 떠난다는 뜻의 속리산(俗離山)은 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아 처음 이 산에 들어서는 순간 남다른 소회를 갖게 됩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말티재를 넘어오는 순간 풍진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에 들어오는 긴장과 설렘을 느끼게 되기에 말입니다.

삼국유사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數石記)’에 보면 속리산의 본래 이름은 구봉산(九峰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라 선덕왕 때 소달구지를 타고 길을 가던 사람이 앞에서 걸어오던 진표율사 앞에 소들이 넙죽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을 보고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 서랴” 감동해 스님을 따라 입산수도한데서 속리산이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합니다.

그 뒤 해동공자라 일 컸던 최치원이 속리산에 왔다가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상을 떠나지 않는데, 세상이 산을 떠나있구나(山非離俗俗離山)’라는 시를 남겨 후세에 회자(膾炙)되면서 그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처럼 속리산은 도(道)의 경지로 은연중 비유되어 보통 산과 달리 그 명성이 팔도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이 시는 최치원의 것이 아니고 조선 선조 때 선비였던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임제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中庸)’을 800번 읽고서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이라고 시 한 귀를 지었으니 이는 중용의 말을 끌어다 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시는 최치원의 것이기도 하고 임호의 것이기도 하고 멀리 중용에서 얻어 온 것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속리산은 범속(凡俗)의 산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거기에 법주사라는 천년명찰이 있으니 그 어찌 자랑스럽다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근년에 와 매년 관광객이 줄어들어 옛 명성을 잃어가고 그 때문에 생업에 고통을 겪고 있는 주민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행락철 교통체증을 무릅쓰고 모두들 먼 곳으로만 몰려 갈 것이 아니라 가족들 손잡고 천혜의 아름다운 내 고장 속리산을 찾으면 좋지 않을 까 싶습니다. 오색단풍도 감상하고 풍진세상 마음의 때도 씻으니 좋고 경기를 활성화 시켜 주민들의 얼굴에 웃음꽃도 피게 할 수 있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걸 일러 일석삼조(一石三鳥)라 하지 않겠습니까. 일일청한 일일선(一日淸閑 一日仙)이요, 하루가 맑고 한가로우면 바로 신선이다. 때묻은 일상을 떠나 하루 신선이 되는 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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