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대좌 박두영 등 거물급 12명 소환조사
김원근·손재하 소작농 구명 탄원서 제출

해방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조직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 산하 충북조사부의 활동상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공개돼 관심이 집중됐다. 3일 충북개발연구원 산하 충북학연구소가 주최한 학술심포지움 ‘광복 60년 충북60년식민지 유산과 충북’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이강수 학예연구사(국가기록원)는 반민특위 충북조사부 활동에 대한 관련 자료를 발표했다.

발표자료에 따르면 1949년 1월 반민특위 도별 위원장을 임명하면서 충북에서는 당초 이세영 옹이 선정됐으나 건강상 이유로 사임함에 따라 혜춘 경석조 선생이 선정됐다는 것. 도조사부 위원장은 대부분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선정됐고 경 위원장도 3·1운동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로, 해방이후 통합한독당 감찰위원으로 활동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도조사부의 조직은 중앙과 같이 사무분국에 제1조사과(정치방면) 제2조사과(경제방면) 제3조사과(일반사회방면) 그리고 특경대를 별도로 운영하였다. 도조사부는 사무분국장 1명, 조사관과 서기관 각각 3명, 특경대원 약 10명 내외, 그리고 일반사무원 등 총 규모는 20∼30명 내외로 구성됐다. 사무실은 충북도청 인근의 문화동 적산가옥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도는 3월부터 8월말까지 체포 19건, 미체포 5건, 송치 26건 등 총 50건을 취급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도조사부의 반민피의자 12명 명단을 보면 금풍주, 김감복(국민총력조선연맹 청주지부장, 청주경방단 부단장) 김원근(중추원 참의, 임전보국단, 충북도회의원) 김창영(경찰청 경시,만주국 치안부이사관) 박두영(중추원 참의, 육군대좌, 민생단 단장) 손재하(중추원참의, 충북도회의원) 안재욱, 이명구(중추원 참의, 충북도회 의원, 임전보국단 충북지부장) 이민호(고등계 형사) 이산연(청주신사 출봉, 청주신궁) 홍순복(매일신보 충북지부장,조선농회 및 정신대 간부) 한정석(중추원 참의, 경찰 경시) 등이다.

도조사부, 조사개시 4개월만에 서울 반민특위 침탈당해
특히 충북도 ‘반민1호’ 사범으로 체포된 박두영은 구한말 국비로 일본 육사(15기생)를 졸업하고 유동열 등 의병을 토벌한 인물. 그는 의병대장 이강년을 체포·사형에 처한 공로로 훈3등을 받기도 했다는 것. 이들 12명 가운데 김갑복은 1년 실형을 받았고, 김창영은 공민권 3년 정지형을 선고, 이민호는 1년형, 한정석은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강수 연구사는 충북의 반민 피의자 명단을 보면 “타지역에 비해 거물급을 체포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반민특위가 전국에서 체포한 682명의 반민피의자 중 군인출신은 충북조사부에서 체포한 박두영(육군대좌)이 유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49년 6월 반민특위 서울사무실이 경찰에 침탈당하고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정국이 보수반공 세력의 득세로 바뀌면서 도조사부가 작성한 ‘범죄보고서’(중앙조사부에 보내는 공식보고서)가 피의자들의 선처를 구하는 방향으로 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49년 8월 경석조 위원장이 중앙 위원장에게 보낸 김원근 옹에 대한 평가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 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5가지 항목을 들어 김옹에 대한 선처를 요청했다.
1.피의자 김원근은 도내 각층의 빈민구제에 다대한 공헌이 있는 사실
2.도내 교육사업에 공적이 현저한 사실
3.소행이 도민의 사표가 될 만한 사실
4.현재 경영하는 사업에 김원근 이외의 인사로는 계속키 곤란하다는 사실
5.일반의 진정이 다수이고 특히 소작측에서 다수인 점으로 보아 농민지도의 실적이 확실한 사실

   
’피의자 선처’로 무뎌진 도조사부 칼날
충북도 조사부는 서울보다 2일 늦은 6월 8일 특경대 해산을 당하게 돼 사실상 피의자 연행과 조사관 신변보호가 어렵게 됐다. 결국 조사활동은 소극적으로 위축됐고 반대로 친일 비호세력들은 ‘탄원서’를 통해 적극적인 구명활동을 전개했다. 김원근 옹의 경우 자신의 소작인과 대성학원 직원들이 “자부(慈父)”, “위대한 인물”, 심지어 “민족이 낳은 희세의 인물”로 표현한 탄원서를 작성해 관계기관에 제출했다.

영동 출신 손재하는 “해방이후 교육사업 및 건국운동에 헌신했다”며 일제시대 행적을 무마시키려 시도했다. 소작농들의 탄원서에 따르면 충북도회의원, 중추원 참의직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맡게 됐고 “부득이 일제의 지원병 징용제도와 침략정책에 추종케 된 것은 군민일동이 숙지하는 사실”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영동중학교, 농업학교 설립 기금, 독립촉성운동회 기금 제공 등의 ‘치적’을 열거하고 있다.

반민특위 와해의 일차적 요인은 이승만 친일정권과 해방직후 미국의 군정에서 비롯됐다. 친일파와 그 비호세력들은 49년 반민특위 출범 이전에 이미 중앙과 지역사회의 조직력을 장악한 실세였다. 충북에서도 대립전선은 친일파·지방유지 대 충북조사부 자체였다. 그럼에도 1949년 6월까지 충북조사부가 친일파청산 정국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민족적 명분과 도민의 열망때문이었다.

하지만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김구암살 등 전국적인 반공정국과 함께 충북지역에서도 반민특위 특경대 해산사태가 벌어지면서 민족적 명분은 혼선되고 상당수의 비조직화 된 일반대중은 이탈함으로써 도내 추진세력은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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