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 8월 30일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넘어 전남 광양으로 가던 중 도로에서 두꺼비를 발견했다.
황소개구리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양서류인 두꺼비는 요즘엔 시골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들다. 낮에는 은신처에 숨어있다 밤에 먹이 사냥을 나서기 때문에 더욱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어림잡아 10cm가 넘었던 두꺼비는 매우 큰 편에 속했고 두꺼비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섬진강과 가까운 곳에서 만나 더욱 반가웠다. 비록 인적이 드문 도로였지만 혹시나 달려오는 차에 비명횡사(?)하지 않도록 촬영이 끝난 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었다.
시골 농로나 차도에는 차에 치어 죽은 동물을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사람이 키우는 개나 고양이 뿐 아니라 족제비나 산토끼, 뱀은 물론 심지어 산돼지, 고라니 등 야생동물의 시체도 가끔씩 볼 수 있다. 자동차와 도로가 늘어날수록 동물들의 생명을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윤택해지고 있지만 동물들의 살 곳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특히 먹이를 찾기 위해서라도 이동할 수밖에 없는 야생동물의 경우 통행로조차 없는 도로를 건너기 위해선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한다. 조금만 한눈을 팔았다면 필자가 보았던 두꺼비도 생명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섬거마을 두꺼비가 왜구를 물리치다

섬진강(蟾津江)의 ‘섬(蟾)’자는 두꺼비를 말한다. 모래가 많아 ‘다사강’, ‘모래내’라 불리웠던 이곳이 섬진강이 된 것은 섬진강 하구를 노략질하던 왜구를 보고 ‘섬거(蟾居)’에 살던 수 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몰려나와 울부짖어 왜구를 물리쳤다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왕(재위 11년, 1385년)이 섬진강이란 이름을 내렸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18세기 초까지 수백명의 수군들이 주둔했던 다압면 섬진나루에 가면 4기의 돌두꺼비가 왜구를 물리쳤던 무용담을 말없이 전해준다.
두꺼비가 몰려나온 섬거마을은 섬진강에서 8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고려 초부터 역참이 존재했다고 한다. 지금도 ‘말죽거리’, ‘마장터’ 등 옛 지명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면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 ‘천룡제(돌배나무)’, ‘지신제(당산나무)’, ‘별신제(승려송별터)’를 지낸다.
동제를 지내는 자리를 일일이 가르쳐 주신 토박이 김재영 할아버지(79)는 “산성이 있는 각산 아래에 말을 많이 키웠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적부터 들었다”며 “백제와 신라의 접경에 있어 우리 마을은 삼국시대부터 요충지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며 마을 지명의 유래를 설명했다.
실제 마을 뒤편 각산(角山)에는 길이 300m 규모의 산성이 존재하고, 봉화대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어 군사 요충지였던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섬거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각산산성 뿐 아니라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마로산성, 불암산성, 봉암산성이 있고 고려시대에 축성된 중흥산성이 버티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격전지였음을 보여준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는 고려 후기부터 이 지역 모든 산성은 왜구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중흥산성의 경우 임진왜란 때 의병과 승병의 훈련장으로 사용됐고, 마로산성에서는 광양읍성을 되찾기 위해 왜병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겉으로 보기엔 징그럽게 생겼지만 두꺼비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주 친밀한 동물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장독대 사이로 두꺼비가 머리를 내밀면 할머니께선 비가 오거나, 집안에 재물이 들어올 모양이라며 길조로 여겼다.

두꺼비가 왜구를 어떻게 몰아냈나

뿐만 아니라 두꺼비가 마당에 나타나면 어른들은 ‘고수레’라 하여 두꺼비 쪽으로 음식물을 던져주기도 했다. 지신(地神)에 대해 예를 나타내는 ‘고수레’가 두꺼비에게도 행해졌다는 것은 두꺼비가 집안의 화를 막는 ‘집 지킴이’의 역할을 맡고 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두꺼비와 관련된 민담이나 설화는 매우 많다. 지혜로 여우를 물리친 ‘두껍전’이나 깨진 물동이를 메우는 ‘콩쥐팥쥐전’, 처녀의 은혜를 갚기 위해 지네와 싸웠다는 설화를 보면 두꺼비는 꾀가 많고 의리를 지키는 영특한 동물로 그려진다.
섬진강에서 왜구를 몰아낸 두꺼비의 전설은 섬거마을의 지명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두꺼비가 옛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친숙했던 동물이었을 뿐 아니라 화와 액운을 막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짐작컨대 왜구를 물리쳤던 두꺼비의 실체는 섬거마을이나 그 주변 지역에 있던 군사나 주민일 것이다. 기운이 쇠잔해지던 고려로선 이들의 승전보를 이용해 민심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꼈을 것이고 ‘두꺼비’의 이미지를 빌어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이곳 섬진강에서 두꺼비는 고려의 ‘지킴이’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조상들로부터 아낌을 받던 두꺼비가 목숨 걸고 도로를 헤매고 있으니 가슴만 아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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