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故 강의섭하사, 4박5일 외박 이튿날 부대내 사체로 발견
유족, “자살 동기, 과정, 시신 의문 투성”
군, “승진 누락, 상급자 갈등” 주장

2001년 11월 27일,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에 사는 강구열씨(63)는 육군 하사관으로 복무중인 막내아들 의섭씨(당시 21)에 대한 걱정으로 속이 타들어갔다. 오후 4시 30분께부터 막내아들에 대한 이모저모를 묻는 전화가 소속 부대에서 연속적으로 걸려온 것이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강씨는 4번째 통화에서 ‘도대체 우리 의섭이 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그러느냐’며 다그쳤다. 그제서야 부대관계자는 ‘강하사가 오전 11시 30분경 무장탈영했다’고 상황설명을 했다. 하지만 강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전날 4박5일간의 외박을 마치고 아무 일 없이 귀대했던 막내가 부대를 탈영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날 오후 5시 30분께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통보받았다. ‘강의섭하사가 부대벙커에서 K2소총으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동생 사망소식을 접한 큰누나 강숙희씨(33)는 충격속에서도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평소 동생의 성격과 군 생활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강씨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군의문사 가족협의회를 지원하고 있는 천주교 인권단체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강씨와 단체관계자는 제5군단 145정보대대 예하 감청기지를 방문해 사건경위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부대측에 따르면 숨진 강하사는 사건 당일 오후 1시 30분께 첩보 감청기지 상황실 근무중 무기함안에 있던 K2소총 1정과 실탄을 탈취한채 탈영했다는 것이다. 오후 3시 40분경 기지순찰을 나온 홍모준위가 강하사의 잠적과 무기분실 사실을 확인하고 1시간 동안 자체 수색작업을 벌인 뒤 군단에 보고, 인근 부대까지 동원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였다는 것. 하지만 강하사는 부대 철책아래 벙커안에서 발견됐다. 이마 한 가운데 총상을 입고 쓰러진채 숨져있었다.
육군은 5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지난 4월 수사결과를 유가족에게 통보했다. 사인은 총기로 인한 자살이며 동기는 ‘승진누락으로 인한 비관과 기지장과 갈등’으로 분석했다. 사건초기부터 녹음기를 휴대하고 부대관계자들의 진술을 녹취해온 큰누나 강씨는 군의 수사결과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의도적으로 ‘자살스토리’를 만든 것이라고 반박했다. 우선 군의 주장대로 소총자살일 경우 이마를 겨눈다는 자세부터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선채로 이마에 총구를 붙이고 방아쇠를 당긴다는 것은 자살자가 택하기에는 거북한 자세라는 것이다.
지난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한 일본 법의학자 카미야마박사도 강하사 사건에 대한 사진판독에서 자살 자세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유가족들은 총성을 듣지 못했다는 부대원들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경 100m에 불과한 기지에서 벙커와 상황실이 50m 거리에 불과한데도 부대원 2명을 제외하고도는 아무도 총성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씨는 “의섭이를 찾기위해 부대수색에 나선 병사 2명이 총소리를 들었다는데, 당연히 의심을 품고 샅샅이 확인하는 것이 상식아닌가? ‘설마’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진술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결국 사체도 사단 병사들이 수색하면서 뒤늦게 발견됐다는 것인데 납득할 수 없다”고 반문했다.
또한 납봉을 한 실탄박스에서 떼낸 봉인지에 강하사의 지문이 확인됐느냐는 점이다. 강하사가 실탄을 탈취했다면 당연히 지문이 나타나야 하지만 정작 군 수사결과서에는 지문감식 여부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다는 것. 사체 부검에서도 의문점이 발견됐다. 식도에서 전혀 소화되지않은 콩나물이 발견됐는데 이는 12시 이전에 식사를 마쳤다는 부대원들의 진술과 비교하면 상충된다는 것이다. 군의 추정대로 사망시간을 오후 3시30분∼4시로 잡는다면 어느 정도 소화된 형태로 나타나야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사건현장의 혈흔 등을 살펴볼 때 사체를 옮긴 정황이 포착됐고 목밑 가슴부위의 피하출혈이 총구압박으로 인한 상처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큰누나 강씨는 “벙커 벽과 바닥에 깔린 비산 혈흔을 보면 사체를 유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혈흔이 고루 퍼져있어야 할 부분에 빠진 것은 제3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특히 의섭이 가슴 윗부분에 난 상처는 의사소견 결과 총구와 같은 크기의 딱딱한 물체로 압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군에서는 가슴의 피하출혈에 대해 이렇다할 설명을 하지않고 있다. 의섭이에게 총구로 가슴을 겨눈채 위협한 정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대해 부대측은 “벙커 내부가 너무 협소해 다른 사람이 총기를 발사하기는 곤란한 공간이다. 비산혈흔이 벽면, 바닥에 골고루 퍼져있고 일정한 높이 낙하혈흔으로 변사자가 서있는 상태에서 실탄을 발사한 것이 분명하다. 변사자가 2002년 중사진급 선발시 누락되자 괴로운 심경을 털어놓았고 기지장과 갈등관계속에 사망 하루전 날에도 기지반장을 배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지장에게 질책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기지장의 사건당일 행적은 모두 조사했지만 의심할 바가 없었고 부검결과 변사자 왼손에 총기 소염기흔이 나타나고 야전상의에 화약흔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자살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편 숨진 강하사 가족들은 육군의 수사결과에 불복, 장례를 미룬채 시신을 포천 모병원 영안실에 10개월째 안치해 놓고 있다. 유족들의 지속적인 민원제기로 육군본부는 오는 10월 재수사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일병 사건으로 본 군 의문사 문제점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을 조사해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10일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1984년 부대안에서 자살한 사건으로 종결됐던 허일병 의문사는 오발사고를 자살로 은폐조작한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의문사위는 “허일병이 사건당일인 84년 4월 2일 새벽 중대본부에서 벌어진 술자리 끝에 선임하사 노모씨가 사병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과정에서 총에 맞아 쓰러졌다”고 밝혔다. 또한 허일병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에 다시 두 발의 총알을 맞았으며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2차 총격을 가한 사람과 그 경위는 밝혀내지 못했다.
군에 입대해 훈련, 사고로 숨지는 장병은 한해 평균 300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자살자는 1/3인 100명선에 이른다. 하지만 허일병 사건처럼 외부로부터 차단된 군조직 특성상 사건의 조작은폐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이다. 유족들이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군사보안지역이라는 이유로 현장출입을 통제당하고 사진촬영이나 자료 수집, 목격자 확인을 위한 면담 등도 제약을 받고 있다. 설사 유족들이 사실조사에 나서더라도 군내부의 짜맞추기 시나리오에 부대원들이 동원될 경우 진상규명은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족이 의혹을 제기할 경우 민간단체의 조사활동 참여가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유가족들은 지난해 9월 ‘군의문사 진상규명 및 군폭력 근절을 위한 가족협의회’를 구성 현재 28명의 피해사례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다. (연락번호 02)777-6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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